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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최승로의 시무28조에 나타난 유가경세사상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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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의 시무28조에 나타난 유가경세사상

시무 28조를 제시한 동기
최승로는 경주에서 후백제 견훤이 신라로 쳐들어오기 몇 달 전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 귀족 최은성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성종 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은성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여 귀순했을 때 함께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왕건은 최승로가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12세에 논어를 읽는 것을 보고 원봉성 학사로 꼽았습니다. 그는 이후 점차 관직에 올랐고, 성종 때에는 문하수 시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6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광종대에 이르러 지나친 불교행사와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를 우대하고 투화한 중국인들을 후대했던 것에 대해 기존 정치세력과 함께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려 4대 광종은 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본격적인 과거제도를 만들고 쌍기를 우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쌍기에 대한 우대를 보고 많은 중국인들이 투하하여 광종은 그들을 후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 신하들의 집과 딸을 골라주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세력의 불만과 반발이 컸다고 합니다. 최승로는 나중에 이점에 대해 하찮은 유랑자에 불과한 그들을 그 지혜와 재능을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특별한 예로 대하자 그들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다투어 옛 덕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상소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쌍기의 건의로 시행된 과거 제도는 공정한 관리의 등용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진 제도이며, 이를 통해 고려는 태조 때부터 호족 중심의 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종의 이러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와 쌍기 등 중국인에 대한 지나친 후대로 인해 기존의 정치세력은 약화되었고 그들의 불만도 높았습니다.

최승로는 성종 원년 성종이 5위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각각 봉사하면서 역대 왕조의 이해득실을 논하자 그는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위 왕의 치적에 대한 평가와 시무 28조를 들었습니다. 다섯 왕에 대한 평가는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의 치적에 대한 평가로, 이는 마치 당 현종 때 오곤이 '정관정요'를 만들어 현종에게 태종의 정치를 본받도록 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승로의 이러한 다섯 왕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성종에게 현군이 되어야 한다는 입지를 심어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경세사상에 있어서는 군주가 현군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무 28조는 성종만이 볼 수 있도록 봉쇄된 내용으로 성종의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28개조의 시무책 중 22조만이 오늘 전했고, 6개조는 거란족의 침입 때 분실됐습니다.

요컨대 그가 시무 28조를 제시한 직접적인 원인은 성종의 요청이 있었지만, 광종의 치정에 대한 불만과 불교의 폐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이를 거울삼아 성종의 개혁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개혁의 목표는 제대로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가적 왕도정치를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시무책을 중심으로 그의 경세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볼까요?

불교의 폐해에 대한 시정과 억불숭배 정책입니다.
최승로는 그의 시무책 중 8개조로 배불론을 펴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의 십훈요에서 보여주는 여러 내용 가운데 불교를 국가정책으로 장려한다는 숭불정책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는 유학의 음양관을 바탕으로 불교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음양과 같은 천지의 깃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 결코 불신 등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광종 때부터 불교의 폐해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광종은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믿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불교의 인과설에 현혹되어 백성들의 피를 빼앗아 거의 불사에 탕진했다고 비난하며 또한 불교 사찰의 착취와 승려의 만행을 비판하고 이를 금지하도록 건의했습니다.

이러한 최승로의 시무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교리적 측면보다는 불교의 현실적 폐해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불교 신앙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는 불교를 수신하는 데 필요한 학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척불론은 정도전의 그것과 다릅니다.

"(유·불·도) 삼교는 각자 맡은 바 있으므로 이를 공경하고 행하는 모든 사람은 이를 혼동하여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천입니다. 수신은 내생의 토대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의 임무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것은 또 그렇지 않을까요?" 

이상과 같이 그는 수신에 있어서 불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유교에 기초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실이고 현실은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그는 현실 정치를 위해서는 유가에 기본을 두고 유가의 정치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승유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유가 경세사상에서 중시하는 군주의 자질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역에 성인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천하가 평화롭다고 했고 논어에는 무위로 세상을 다스린 자는 순왕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는 정중하게 남면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른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순일한 덕과 사심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이 마음을 겸양하고 항상 경외함으로써 신하를 예우한다면 누군가가 마음과 힘을 다하고 나아가 젖을 고하고 물러나 광찬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은 신하를 예로써서 신하는 왕을 충성스럽게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하루하루를 삼가고 오만해지지 않고 신하를 대하는 데 공손함을 생각하시고 설사 죄를 짓는 자가 있더라도 그 경중을 법대로 처리한다면 태평의 위업에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논어에 자기 집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라고 했고 좌전에는 귀신은 자기 족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른바 음무복이 그것입니다. 제사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노역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성의 재물과 힘을 쓰지 않고 백성의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은 귀신에게 비는 복보다 더 실제적인 것입니다. 성상이 기원하는 제사를 버리고 자신을 공경하고 자신을 문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천에 이르면 재앙이 없어지고 복록이 절로 찾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유가경전인 『주역』, 『논어』, 『좌전』 등의 내용을 예로 들며 군주의 자질과 애민사상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군주의 자질이 태평성 위업을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유가경세사상의 모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고려의 역대 군주, 특히 태조의 공적에 있어서 군주의 자질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고려 태조가 군주의 체면과 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예찬했습니다.

첫째, 거란과의 대외관계에서 보여준 심원한 방안, 둘째 발해가 멸망했을 때 그 지배계층을 수용한 포용력, 셋째, 유금필과 같은 훌륭한 장수를 파견하여 북방경계를 안정시킴으로써 보여준 인재등용능력과 자신과 먼 사람을 회유하는 능력, 넷째, 신라의 왕과 신하가 항복할 것을 자청했을 때 먼저 사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많은 지방호족의 투항을 초래한 예양심, 다섯째, 후백제의 평정과정에서 보여준 넓은 도량 등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태조의 장점으로는 평안함에 있어 일락함이 없으며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공손하고 절약 검소함을 숭상하여 적시에 신상필벌을 시행함으로써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였으며,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신임하고 사악한 자를 서슴없이 제거한 사실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태조에 대해서는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예찬한 반면 광종에 대해서는 위에서 본 것처럼 극단적인 혹평을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광종은 쌍기를 중용하고 지나치게 우대하여 유랑자나 다름없는 투화한 중국인들을 후대하고 귀족가문과 딸들을 주어 정착시켰으며, 쌍기의 권유로 과거의 제도를 마련하였고, 과거 호족 중심의 제도로 중앙집권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 귀족계급과 마찰을 빚어 측근세력 외에는 군신 간 대화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종은 과도한 불사를 행함으로써 국가 재정 악화와 국민의 원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승로는 이러한 광종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광종뿐만 아니라 경종도 비판했습니다.

그가 절대군주국가에서 역대 왕조를 그렇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신임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유가적 신념과 용기와 기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조선왕조 성리학자들의 사생취적인 선비정신과 같은 투철한 유학정신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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