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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유학의 본격적 수용, 통일신라시대의 유가경세사상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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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본격적 수용

유학의 전래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한사군 설치를 통해서 본격화됐다고 말씀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승인 아래 통치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고구려 소수림 왕 2년(372)때예요. 이때 처음으로 유학 교육 기관으로서 학문(태학)을 설립하고, 유교 경전과 사서를 가르치고 있으며, 지방에는 각처에 경당(扃당)을 설립하고 유학을 보급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 이전부터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유가적 인재의 육성에 힘썼던 것으로 보여요. 시조 주몽은 후 왕(후 왕)에 길에서 다스리겠다고 유언했지만 이는 유가의 왕도 정치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에요.

백제도 건국 초기부터 유학을 수용하고 오경과 사소류과 제자 백가의 사상을 수입하며 국왕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문체인 표(표)와 소(소)도 가고 사용했으며 1), 그리고 국쵸에서 박사 제도를 두고 무령왕(무령왕 때에는 오경 박사라는 관직을 설치하기도 했어요. 고이왕(고이왕)52년(285)에는 유학 박사 왕인(왕인)이 일본에 『, 천자문 』과 『 논어 』, 『 효경 』을 전했어요. 또한 백제의 벼슬 이름에 나타난 시궁창(사도부)·사콤브(사공부)·삭브(사구부)등의 사도, 사공 사구 등은 『, 서경(서경)』, 『 주례(주 예산)』에 나타나고 있는 중국의 관직명으로 유가의 경전에 따른 것이에요.

이런 점에서 백제도 처음부터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고 말씀할 수 있어요. 특히 백제는 유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충성과 정절을 중시했으며 이로써 백제 말기 성충, 계백 장군 흑치상지 같은 충신들이 나왔으며, 도미(도, 카즈야)부인의 일화에서 보듯이 왕의 위협 속에도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킬 수 있는 열녀가 나오고 있으며 백제가 망할 때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뛰어내리고 죽음을 택하고 정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유학이 백제인의 생활 규범으로 자리한 것을 입증하는 사례예요.

신라는 지리적 환경에 의해서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그들보다 훨씬 뒤에 유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요. 『서요(양서)』에 신라에는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표시하고 신표(신표)을 하고 있어 언어도 백제를 통해서 의견을 소통했다고 해요. 그러나 신라에서도 6세기부터 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503년 마립간, 니삭무 차 자웅과 같은 고유의 왕호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국호와 연호도 유학의 방식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신라 통일 이후 신문왕 2년(682)에는 국립 대학인 국학(국학)을 재건하고 경서와 제자 백가의 서적을 가르치고 있으며, 성덕 왕(성덕 왕)16년(717)에는 왕자 스튜어트(수충)이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공자와 10시즌 72제자의 화상을 갖고 왔으며 원성 왕 4년(788)에는 독서 출신과(독서 출신과)을 두고요 『 왼쪽(좌전)』, 『 예기(예산기)』, 『인 문선(문선)』, 『 논어(논어)』, 『 효경(효경)』, 『 곡리에(곡례)』 등을 읽어 그 의미에 능통한 자를 관리로 채용했어요. 통일 신라 이후 신라인으로 당에 들어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58명에 이른다고 해요.

 

통일신라시대의 유가경세사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삼국시대의 체계적인 유가경세사상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삼국사기는 주로 신라를 중심으로 쓰여졌고 신라보다 선진 유교문화를 수용한 백제와 고구려의 유학사상은 거의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가경세사상은 조선조 말까지 주나라 문왕이 찬술했다는 주례를 모델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백제인들이 그들의 관직명을 지을 때 이를 참조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유가의 경세사상을 연구하고 독자적인 경세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에도 을파소와 같은 현자들이 있어 유교적 통치이념에 따라 정치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유가경세사상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통일신라 이후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정치기구의 확대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유학을 장려하고 국학을 재건하여 전제군주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학자는 강수, 설총, 최승우, 최치원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될 뿐입니다.

강수(康壽, ?~692)는 충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석체입니다.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효경』, 『곡례』, 『이아』, 『문선』 등을 배웠으며, 태종무열왕 때에는 당과 신라 사이의 외교문서 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신문왕 2년에는 국학을 재건하여 여러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설총과 함께 9경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강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태종무열왕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머리뼈가 뒤로 튀어나왔다 하여 강수선생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술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유학 실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찮은 대장간 딸과 사귀어 결혼하려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자 그는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학문을 하더라도 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처럼 그는 유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총(650~740)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경사에 두루 통하며 이두를 체계화시키고 강수와 함께 박사로서 9경을 강론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저술은 『삼국사기』에 『화왕계』 한 편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왕계는 장미와 할미꽃이 화왕을 찾아간 이야기로 우화적으로 왕의 비행과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왕인 신문왕이 이 우화를 듣고 글로 써서 왕자의 계엄을 이루도록 요청하였고, 따라서 그는 국왕의 수양 내지 도덕적 권위를 강조한 <풍왕서>를 만들어 국왕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유가경세의 이상형 덕치 내지 예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신라 최초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 유학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났는데, 이는 유학이 보급되고 생활화되면서 선진문화를 배우려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도 하였는데, 한편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사람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등과함으로써 이들의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입신양명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신라는 원성왕 4년(788) '독서출신과'를 설치하고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거제도는 유가경전을 상·중·하 3품으로 나누어 이해도를 시험하는 제도로서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유학이 급속히 보급되었습니다.

신라 말 최치원(崔 、元, 857~?)은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난 육두품 계층 출신으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는 당에 16년간 머물면서 그곳 벼슬을 하기도 했고, 황소 난 때에는 황소를 토벌하는 사령관의 고변 지휘하에 들어가 황소 토벌 격문을 만들어 황소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28세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진성여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미 기울어진 신라를 위해 시무책 10여조를 제시하여 아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라 골품사회의 푸대접과 난세에 절망하여 실의에 빠져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풍월을 읊었고, 마지막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글로 문답했다고 했고, 그의 문인들은 고려에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에는 『중산복궤집』5권과 『계원필경』20권, 『46집』입니다.1권 제왕연대력과 문집 30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계원필경』20권과 금석문자 및 시문을 조금 전할 뿐입니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긴 하지만 도교나 불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받아들여 3교를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유·불·도 삼교의 융합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신라골품사회의 홀대에 일종의 좌절감을 안고 실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처럼 당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중국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만한 지적 수준에 이른 김운경, 김가기 등이 귀국 후 사상적 유랑의 길을 걸었던 점도 같은 맥락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1)

최치원은 전통적인 유가경세사상처럼 삼강오륜 등 유가윤리관을 통해 무너져가는 봉건제도를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치계급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강남녀' 등 여러 편의 시에서 권력층과 귀족계층의 교활하고 허위로 가득 차 탐욕스럽고 부패한 행위를 비판하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가난하고 지친 삶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황소 토벌 격문에서는 봉건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이러한 이중 태도는 유가 경세사상의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경세사상에는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해서는 정의와 같은 수평적 사회규범보다는 충효와 같은 수직적 사회규범을 강조함으로써 봉건질서를 옹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유가경세사상에는 애민·위민정치를 이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부패한 제도나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 내지 개혁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기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시대의 유가경세사상은 부패한 사회상과 무능한 군주들에게 외면당하고 골품제의 사슬 때문에 현실로 이어지지 않아 유학자들이 현실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 독자적인 길을 잃고 도불의 형이상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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