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의식과 국방론
대체로 유가 경향론자들은 모의 내지 사대주의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최승로는 조선조 초기 유가경 여론자인 정도전·변계량·양성지 등 비교적 적중국에 대해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려 지배층이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의 풍속이나 문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중국의 제도는 따를 수밖에 없지만 사방의 습속은 각각 토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길은 당연히 중국의 것을 본받아 외설적인 것은 고쳐야 하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과 같은 제도는 우리의 풍속에 따라 사치와 검약의 중용을 얻도록 하되 반드시 중국의 것과 마찬가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최승로는 유가경전의 가르침과 그 정신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면서도 그 밖의 한국 고유의 제도는 변경하면서까지 중국의 것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민족자주의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주의식은 태조의 십훈요 중 제4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태조는 십훈요에서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예악에 있어서 모두 그 제도를 따랐으나, 방위가 다르고 땅이 다른 만큼 인성도 다르니 반드시 궁색하게 그들과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승로의 자주의식은 태조의 이러한 중국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자주의식 때문에 광종이 중국인 쌍기 등을 우대하고 중국의 문물을 지나치게 숭상했던 것에 대해 광종의 치적을 혹평한 일면도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주의식을 가지고 국방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란과 여진의 끊임없는 침입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북방 경계를 확정하고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승로는 이 밖에도 다양한 문제에 관해 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그의 경세사상에서 위민 내지 애민사상은 시무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특권층과 사찰, 그리고 지방 호족들에 의해 부당하게 유린당하고 있다고 보고 그 시정을 위해 11조에 걸쳐 시정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경세사상이 유가의 애민사상에 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리학의 도입 과정
고려는 고종 때 7차례에 걸쳐 원의 침입을 받아 최씨의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자 고종 46년(1259년) 원나라와 화친을 맺었고 이후 고려 태자와 학자들을 원나라로 인질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성리학 도입도 인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말기로 추정됩니다. 충렬왕은 자신이 1272년에 원나라에 갔고, 1274년에 원나라 세조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해에 제위에 오른 후에도 자주 원나라에 왕래하면서 원나라 풍속과 그 문물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1280년에는 7명의 학자를 선발하여 경사교수로 임명하여 국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296년(충렬왕 22년)에는 경사교수 도감을 설치하여 7품 이하의 관리들에게 경사를 가르치는 등 기존의 사장학 중심에서 경학중시의 학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충렬왕의 경학을 중시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원나라 유학자들이 주자의 성리학을 도입하였습니다.
주자학은 이처럼 원과의 교섭관계에 있던 정치 외교적 파생관계에서 도입되었지만 고려의 국내적인 여러 요소, 즉 고려 후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고려 후기에 들어 고려 초기에 시행되던 전시과 제도가 점차 느슨해지면서 토지 겸병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한 자영농과 소농이 몰락하면서 백성들은 유랑화되고 국가는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사회신분제도도 흔들려 정치체제가 극히 문란해졌습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방을 통한 인사권의 전횡과 매관 마술이 다반사가 되었고, 나아가 사찰경제가 비대해져 사찰은 세금과 병역을 기피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원의 간섭기에 들어서는 원나라에 의해 왕권이 심각하게 유린당함에 따라 국가운영체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개혁적 성향을 지닌 유학자들이 불교나 사장학의 대안으로 실학으로 간주한 주자학을 도입한 것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백이정(1260~1340)이 1298년 충선왕의 종신이 되어 원나라 연경에 10년간 머물다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이재현, 박춘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양(일명 안향, 1243~1306)은 그보다 9년 앞선 1289년(충렬왕 15년)에 충선왕의 배신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이때 새로 간행된 『주자전서』를 보고 주자학을 접했다고 하며, 이후에도 백이정과 같은 해에 원나라에 가서 주자학을 연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향은 말년에 항상 주자의 초상을 걸고 경모하여 마침내 자신의 호를 주자의 호인 회암을 따서 회헌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안향은 충렬왕에게 학사양성을 위한 육영재단인 섬학전 설립을 건의하여 황폐해진 유학교육기관을 회복시키고 학문진흥의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박사 김문정 등을 중국으로 보내 공자와 72현의 초상을 그려 제기·악기·육경·자사를 손에 넣도록 하는 한편 이상·이진 등 뛰어난 유학자들을 천거하였고, 경사 교수도 감사로 삼았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명의 학생들이 그에게 배우러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안향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도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향의 문인은 수백 명에 이르지만 그중 성리학 연구에 기여한 사람으로는 백이정 신천 권보 우탁 등이 있습니다. 백이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학 도입에 기여하였고, 신천은 일찍부터 구재에 들어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후일 명유로 간주되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전거가 없습니다.
권보는 양촌 권근의 증조부로 이제현의 장인입니다. 권보는 두 번이나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유학이 주자학 중심으로 바뀌면서 오경보다 사서를 더 중시하여 <사서집주>를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것을 보고 귀국하여 <주자사서집주>를 간행 보급하였습니다. 우탁은 경사를 통해 역학에 조예가 깊어 정이의 『역전』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가 한 달 남짓 연구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성리학이 처음으로 확산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안양 문인들에 의해 성리학이 보급되기 시작하여 충선왕 때에는 기존의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명하였고, 공민왕 16년(1367)에는 성균관을 확장하여 이색을 그 최고직인 대사성으로 임명하였고, 김영구, 박의준, 박상춘, 정몽주, 이승인 등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성리학 도입기의 사승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백이정에서 이재현→이곡→이색적으로 이어지며, 이색 문인으로는 정도전·이승인·권근·정몽주·길재·변계량 등이 있습니다. 이제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 고려 말의 성리학적 경세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유학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말의 대유이색 (0) | 2022.08.17 |
---|---|
고려말의 유가경세사상 (0) | 2022.08.16 |
유학의 본격적 수용, 통일신라시대의 유가경세사상 (0) | 2022.08.14 |
최승로의 시무28조에 나타난 유가경세사상 (0) | 2022.08.13 |
유학의 한국도입 (0) | 2022.08.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