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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고려말의 유가경세사상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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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유가경세사상

정방혁파, 과거제도 개선을 주장했습니다
이제현(益齋, 이제현 1287~1367)은 충렬왕 13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검교정승 바이너리(李 15)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성균 때 우두머리로 합격하였고 병과(병과)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시험관이던 권보가 그의 재능과 지혜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28세 때 성균악정에 이르러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왕인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여수(燧守), 염복( 趙福), 원명선(元明善), 조맹후(趙孟 () 등과 교류했습니다. 그는 1323년 충숙왕 10년 유청신·오잠(吳 ()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을 설치하고 원나라의 다른 성과 동등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그는 도당에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무너지게 되자 호소하여 이를 철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충선왕이 서번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곳에 동행하였고, 충숙왕이 연경에 5년간 억류되었다가 복위되어 죽자(1339년) 심양왕 고( が)가 원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알고 정승조적(趙 しよう)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꾀하였고, 사형당하자 그의 무리가 연경에 남아 있어 인심이 매우 동요하자 그는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잘 절충하였습니다.

그는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하기로 우천순에 임명되어 정동성사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문하시중(門下時中)으로 공민왕 6년에 관직을 그만뒀고, 이후 10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명에 따라 실록을 수찬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충을 실천하고 있으며 많은 주자학자를 길러 등용한 성리학자입니다 개혁정치인이며 춘추필법에 따라 역사를 쓰고 고려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하정도 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익재난고>, <역언패설>, <익재가집>가 있습니다.

이제현은 고려 말 이곡(李谷) 이색적인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그가 제시한 정방폐지와 과거제도 개선론을 통해 많은 주자학자들이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는 광종 때부터 시행된 과거제도가 책문(책문)이 빠져 사장(사장) 중심의 시부론(시부론)이었던 문장 장식에 몰두해 국가경영에 필요한 도학적 성향의 인재를 선발하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정말 학교를 널리 일으켜 육예를 높이고 오교를 밝힘으로써 선왕의 길을 밝히신다면 누가 진유를 등지고 불교를 추종하는 것이며, 실학을 버리고 장구를 익히겠습니까? 그러면 사장(사장)을 쫓던 세력이 모두 경을 밝히고 행실을 닦는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현은 과거 과목을 사장 중심에서 책문 중심으로 바꾸고자 한 것은 송나라의 판중하, 주희, 그리고 원나라의 주자학자 허형의 경의(경의)와 책문을 중시하는 것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그의 성립 사찬에서 밝혔듯이 시부적 중시는 미사여구나 글 작성에만 집중하고 예비 관료층이 현실문제 해결에 무지하거나 귀족적 성향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제로 충숙왕 7년 6월 예부의 시험과목 중 시부를 없애고 책문을 포함시킨 바 있습니다. 그리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그는 여러 개혁안 중 과거의 시험과목 개혁안을 제출하였고, 이로써 시험과목은 육경의, 사서의, 고부, 책문으로 바뀌게 되어 주자학자의 등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현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는 충목왕대는 사대부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이제현은 어린 충목왕이 등장하자 충목왕에게 도당에 올리는 상소 형식으로 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수신을 강조했습니다. 유가의 경세사상은 왕도정치의 실현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요·순·3대의 치세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경세사상은 기본적으로 현명한 군주에 의한 인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현도 주자학적 성군의 도통을 그대로 따라 그가 중국에 갔을 때 우·당·문왕의 삼왕묘를 배알하고 그들을 기리는 송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우왕은 9년간의 홍수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돌봤고 탕왕은 초야의 현인을 등용하여 민심에 순응하여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문왕은 국토의 2/3나 통치하면서도 은나라 섬김에 상처가 없었다고 찬양했습니다.

이제현은 이처럼 이상적인 군주상을 유가의 도통론에 입각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충목왕에게 군주 수신론을 제기한 또 다른 이유는 충혜왕 제위 때 충혜왕이 저지른 온갖 탐욕과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비판을 함으로써 그것을 거울삼아 선량한 정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심어주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현은 충목왕 원년에 무인정권 이후 폐지된 경연(經 し)의 필요성을 재인식하여 서연의 설치를 건의하여 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연은 유교 경전을 주로 강의했는데, 서연은 정승급 대신들이 학문은 물론 정치 현안까지 논의하는 일종의 정치기구였습니다. 그는 이 서연을 자신의 개혁안을 실현할 수 있는 장으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충목왕의 짧은 재위기간(4년)에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연이 다시 시작된 것은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그가 이상에서 논의한 정방 폐지와 과거 시험과목 변경, 서영관 설치와 같은 제안은 수구세력의 반대로 시행에 어려움이 있었고 원의 꼭두각시 인형놀이를 한 어리석은 군주 때문에 좌절되었으나 개혁군주인 공민왕대에 이르러 그가 정승 자리에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춘추필법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경종대에 제정된 전시과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토지겸병에 의한 대지주의 출현과 불교사찰경제의 확산으로 관리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으며 국가재정도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례』에 따라 맹자가 제시한 정전법의 원리를 살려 한국의 상황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 경계를 정하는 양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구분전과 녹과전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정전의 원리는 땅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들에게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시과 제도로 되돌리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세 문제를 두고 백성들이 폭련에 시달려 아이들을 노비로 파는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한탄하며 국가가 대속해서 지급해야 한다고 했죠. 산 사람은 자수시키고 자수하지 않는 사람은 벌로 다스리는 한편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부모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그 전 왕인 충혜왕 당시 가혹하게 부과했던 공부를 면제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밖에도 검소한 기풍을 일으키는 것, 사치 방지, 탐관 오리를 징벌하는 것 등 사회 개혁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주자학의 보급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개혁사상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을 개혁하려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후대의 많은 주자학자들의 개혁사상의 범주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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