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의의
1. 유학에 대한 편견과 현대사회에서 유학의 역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학은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양인의 의식 속에는 유가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산업혁명에 의한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동양사회의 침체를 유학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문화사 가들 중 유학은 역사를 순환·반복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유학에 익숙한 인간의 의식도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유학을 기반으로 하는 동양인들은 천인합일의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학에 기초한 동양적 의식구조는 서양인의 변증법적 사관과 다른 것으로 극에 달하면 반전되는 유학의 순환 사관을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문화 비평가 중에는 이러한 순환 사관으로 동양 사회의 정체를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순환 사관에 물든 동양인 자신도 한때 그렇게 생각하고 유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시작하여 1919년 5 사운동 때부터 본격화되었고 1968년 마오쩌둥의 비림비공 운동으로 극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 멸시하는 경향은 1900년대 초 한일병합 이후 본격화되었습니다.
특히 주권 상실이라는 국가적 비극을 겪은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국가의 통치이념이었던 유학을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조선유학사>의 저자인 고사 가는 식민지 사관을 통해 조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성리학을 비난한 바 있는데, 한국의 사가는 그 숨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학을 경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확산 보급되었습니다.
독일의 문명비평가 막스 베버는 근대화와 산업화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 자연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자연의 이법을 파악하고 이용하도록 한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를 신봉하지 않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프로테스탄 지즘과 자본주의 형성'에서 칼빈주의 예정설과 직업 소명의식을 강조했고 이것이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 주의와 달리 서양은 역사나 생활이 모순→대립→투쟁의 과정을 거쳐 종합에 이른다는 변증법적 사고가 지배해왔지만, 이러한 사고 유형을 바탕으로 한 서양 문화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변증법적 사관을 앞세워 서양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보는 반면 동양은 극에 달하면 반전된다는 순환 사관이 지배해왔기 때문에 동양은 정체되고 발전이 더디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유교문화권에서 급격한 경제발전이 있게 되자 그동안 서양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사관 내지 기독교적 사관으로서는 더 이상 동양사회의 발전 상황을 설명할 수 없게 되자 유학의 인간관계와 근면 및 교육을 중시하는 점이 경영의 인사관리에 도움이 되고 지식산업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동양 유교문화권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유학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유학 이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지는 별개 문제라고 해도 유학에 기반을 둔 동양사회가 향후 경제발전에 세계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것은 유학과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언급된 유학과 경제발전과의 순기능 내지 역기능적 관계를 떠나 오늘날 산업사회 내지 정보화 사회가 가져온 가치관의 전도로 인한 다양한 사회병리적 현상을 치유하는 데 유학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오래전부터 유학을 중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채택해 가르쳤고 중국에서도 공산주의를 계승한 장쩌민 주석은 유학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병균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과 같다며 유학을 국가발전 과제의 하나로 채택해 기존의 마오쩌둥식 유교 배척 경향에서 친유 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일찍이 명치유신 때 서양의 물질문명은 받아들이고 동양의 정신적 문화는 계승해야 한다는 이른바 동도서기라는 취지로 일본 퇴계학파의 한 사람인 혼다 히데 카제가 제안한 교육칙어를 만들어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육칙어'의 내용이 퇴계의 '성학십도'를 모델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유학이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유학이 어떤 순기능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된 유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유학의 의미와 그 성립과정입니다.
유학이라는 용어는 유교, 유가, 유술, 유도 등과 혼용되어 사용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교는 잘 알려져 있듯이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공자에 의해 창시된 것입니다.
공자는 주나라가 지방 제후의 패권으로 구심점을 잃기 시작하자 기원전 496년 그의 55세에서 67세까지 14년간 중국 천하를 두루 돌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반영하려 했으나 그에게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그의 고향인 노나라 취푸로 돌아가 교육을 통해 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교단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모였고, 일가를 이룬 사람도 70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집단들이 유생들의 집단을 형성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점차 체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교를 창설한 사람은 공자이고, 이 공자의 가르침이 바로 유교입니다. 유가라는 말은 전국시대 제자백가가 출현하자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분류의 명칭으로 쓰였고, 유술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무제가 유교로 사상을 통일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유교를 국교로 삼고 태학을 세우고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이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유교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때부터 사용된 용어입니다.
유학이라는 용어는 후한 이후 경학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과거 제도의 확립과 함께 유교를 가르치는 학교도 늘어나면서 경학 연구를 통한 학문 체계가 수립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도 또는 도학이라는 용어는 송대 이후 원시 유학인 동맹 유학이 불교 또는 도교의 성행에 자극을 받아 그들의 이론을 흡수하여 원시 유학이 형이상학화 되고 유교의 도통이 확립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론을 이단으로 배척하면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
이렇게 유학이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공자는 기원전 521년 9월 28일(음력 8월 27일) 노나라 수도 곡부(현재의 산둥성 창평 향추읍)에서 대부(무사계급) 공흘(公 ))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낳자 후처를 얻어 아들 맹피를 얻었는데, 맹피는 딸 하나를 남겨두고 일찍 죽었기 때문에 64세 때 16세 안 씨의 셋째 딸 징재를 맞아 6년 뒤 공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세 살 때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가정은 가난해졌고, 그래서 공자는 어려서부터 계손씨 가문의 양곡관리와 목장 관리를 했습니다. 공자는 아버지를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매사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음악을 좋아해서 그것을 배웠고 특히 학문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기 때문에 15살 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날 일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67세 때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 『서경』과 『예기』를 편찬하여 『시경』을 산정하고 『악경』을 바로잡고 『역경』을 연구하여 전을 쓰고 『춘추』를 만들어 2) 유가경전을 확정하였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그가 가르친 육예에 정통한 사람이 72명이나 되어 그들을 통해 그의 가르침이 널리 퍼졌는데, 이것이 당시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유가입니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 5월 10일(음력 4월 11일) 그의 73세 때 여러 명의 제자와 그의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많은 제자들이 그의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그를 추모하며 공자의 가르침과 평소의 언행을 기렸습니다.
자공은 그 여관에서 3년 이상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제자들은 이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살게 되었고, 그곳에 공리라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들에 의해 공자의 가르침과 평소의 언행 및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하여 편찬한 것이 『논어』입니다. 우리는 이 논어를 통해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 즉 유학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이 논어에서 가장 많이 다룬 사상은 인입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졌고, 유가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은 무엇일까요? 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글자가 보여주듯이 두 사람,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다른 사람에 관해 여러 곳에서 다르게 표현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애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충서' 또는 '효제'라고도 하고, '광언영색'은 '선의인'이라고 하는 등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인 정신은 사랑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묵가의 겸애설과는 전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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