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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조선조 개국이념, 이단배척과 숭유정책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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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개국이념, 이단배척과 숭유정책

이단 배척과 숭유 정책
한국에서는 10세기 최승로가 처음으로 선불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고, 이규보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교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고 이를 시정하는 데 중점을 두어 유불동도론의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특히 이규보는 불교의 사회 안정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호국적 기능을 인정하였습니다.

이후 최해는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교윤리에 기초한 사회관계의 재정립을 강조하였고, 백문보는 주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부정하고 유교문명을 중심으로 한 사회건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고려 말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했지만 교리 자체에 관한 철저한 비판이 아니라 사회의 기능적 측면과 관련된 온건한 비판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유가 입장에서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2단은 유가 이외의 먹·적색과 도·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의 저서를 통해 먹·적·도·불 등의 이단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묵·적과 같은 세력화되지 않은 순수 사상에 대해서보다는 도·불과 같은 세력화된 종교에 대해 더욱 비난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는 『심기리편』에서 불가의 수심법을 통해 노자를 비난하기도 했으며 노자의 양기법을 통해 불가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병법의 대가다운 착상으로 이이의 방법을 동원하여 도불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기를 중시하는 노·장·심을 중시하는 불가가 모두 옳지 않고, 이치를 중시하는 유가 입장이 옳다는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길 지각과 동작의 준연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같고, 인의예지의 순수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고 했어요. 이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그 아는 바는 정욕과 이익과 손해의 사사일 뿐이고, 그 움직이는 곳 또한 준연하고 한가롭게 살아 있을 뿐이니 설사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금수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는 유가가 마음을 보존하고 가꾸는데 반드시 의와 이치로써 주로 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노·불의 학설은 청정과 적멸을 숭상하여 비록 인륜의 중대한 것과 예악의 아름다운 것 또한 반드시 제거하고 잘라 소멸하려 하므로 이는 그 가슴속에 욕심이 없고 이익과 손해에 몰두하는 자와 다른 것 같지만 천리의 공정함을 주장하여 인욕의 사사를 제재할 줄 모르므로 그 날마다 쓰고 이야기 행위가 매양 이익과 손해에 빠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탐욕은 사는 것보다 낫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데 이제 노불양가의 학설을 보면 석씨는 반드시 죽고 사는 것에서 벗어나려 하니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노씨는 반드시 장수할 것을 요구하려 하니 이는 삶을 탐하는 것이며 곧 이익과 손해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무엇일까요. 또한 그 안에 의와 이치를 주장하는 것이 없고 효연히 얻는 것이 없으며, 분명히 모르니 이는 몸에 있는 곳이 또 혈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정도전은 노자와 불가가 인간의 사적인 것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는 죽고 사는 것에서 벗어나려 하고 노자는 장수하기를 추구하므로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적인 것, 즉 이익을 탐하는 것이지 유가가 의리로서 마음을 보존하고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불시말>에서는 요·순·우·탕·무왕·공자·맹자·주자 등의 말을 인용해 불교를 배척하는 이유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이단배척의 이유를 "위 6명의 성인과 1명의 현인의 마음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현혹되어 모두 그곳에 빠져들어 사람의 길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먼저 그가 이단을 배척해야 하는 이유를 그의 <불시말잡변>, <벽이단편>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요순이 네 흉한을 베은 것은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을 잘 가꾸면서 명령을 어기고 종족의 친화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왕 또한 "어떻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을 좋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했는데 대개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을 꾸미는 것은 사람의 본심을 잃게 하며 명령에 거슬려 종족의 친화를 무너뜨리고 사람의 일을 망칩니다. 그래서 성인이 제거해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탕과 무왕이 걸주를 치니 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상제가 두려워 감히 칠 수밖에 없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나의 하늘을 따르지 않으면 그 죄가 같다'고 했으니 하늘의 명령과 하늘의 토벌은 내가 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자도 말하기를 '이단을 전공하면 해가 될 뿐이다'고 했으니 해롭다는 한 글자는 읽는 이를 섬뜩하게 합니다. 맹자가 좋은 변론으로 양·묵을 막은 이유는 양·묵의 길을 막아야 성인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양·묵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 묵씨는 겸애를 주장하면 인처럼 여겨졌고, 양씨는 위아를 주장하면 의롭게 여겨지는데, 그 해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데까지 이르므로 맹자가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불씨의 경우 그 말이 높고 묘하여 성명 도덕 안에 드나들며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양·묵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자가 말한 '불씨의 말은 이치에 가까울 뿐 진리를 크게 어지럽힌다'고 한 것은 이를 이름입니다. 나의 어둡고 용렬하면서도 힘의 부족을 모르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나의 임무로 삼은 것은 위로 여섯 명의 성인과 한 현인의 마음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현혹되어 모두 빠져들어 사람의 길이 없어지기에 이를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아! 난신 적자는 사람마다 잡아 죽일 것이고, 반드시 선비나 스승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악한 말이 가로되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면 사람처럼 물리치고 반드시 성현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가 양·묵이나 불씨를 막으려는 것은 그 말이 교묘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무부·무군의 상태로 만들어 사람의 길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요·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을 좋게 하는 것'(광언영색))을 경계해 왔는데, 이단의 설은 광언영색에 의존해 사람을 현혹하고 인간의 길을 어지럽힘으로써 천명으로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저서 『심기리편』입니다.(태조 3년)과 <불씨잡변>(태조 7년)에서 모두가 이단을 배척하고 있는데, 그 강도는 <불씨잡변>으로 더욱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가 개국 이전, 특히 우왕 원년(1375) 그가 이인임·경복궁 등의 친원 세력과 대립하면서 나주군 회진현 거평부곡에 2년간 유배되었다가 유배된 첫 해에 쓰여진 그의 철학서인 심문천답에는 전혀 이단배척의 논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문답형식으로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 년 후에 권근은 정도전의 <심문천답후서>에서 "노불의 간특한 해를 분별하여 백세에 어두웠던 도학을 밝히고 시속의 공리설을 굽혀 도의의 바른 곳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근의 견해는 <심문천답후서>를 쓴 태조 3년(1394) 무렵에는 정도전이 완전한 척불론의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인데, 그 이전부터 정도전이 이단배척의 경향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럼 그가 이단 배척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가 정몽주에게 쓴 글에서 이단을 금수에 비유하여 배척했을 무렵부터 이단 배척을 본격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단은 점점 더 성행하여 우리 돈 나로 쇠퇴하고 백성들을 금수 지역으로 몰아넣은 후 도탄의 고통 속에 빠뜨려 사해가 오만한 세력으로 흘러가 끝이 없으니 아아! 슬프습니다.누가 이런 사태를 바로잡을 겁니까? 반드시 학술이 갖추어져 도덕과 지위가 통달하고 사람들의 신봉을 얻지 않으면 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정도전은 이 편지에서 정몽주가 <요엄경>을 보면서 부처에 아첨하는 것 같다는 세간의 소문을 듣고 자신은 정몽주가 불교의 사곡(사곡)을 알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어리석은 백성들이 고혹될까 봐 정몽주에게 자중해 달라는 뜻으로 글을 쓴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서는 정도전의 강력한 이단 배척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초기 저술 <신문 정답>에서 보여준 견해와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여준 견해와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 보여준 이단배척사상은 유학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이는 그가 일찍이 이색(李 ))의 문하에서 정몽주, 권근, 이승인 등과 함께 주자학을 배운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배길에 여러 승려들과 교류하였는데, 이곳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아울릴라코 생각되었고, 또한 그는 개국 이전에 "태을칠십이국도(태을칠십이국도)"를 썼는데 태을은 본래 도가사상에 의한 것이므로 마음의 고통을 달래고 평정심을 얻기 위해 도가(道家)에 귀를 기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그는 개인적으로 초기에는 도·화에 대한 배척보다는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정도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주자학자들의 공통된 경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주자학이 도화(都火)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도전의 초기 도화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주자학의 근본 배경에 대한 영향과 주자학의 이념적 명분 사이에서 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도화(都火)에 대한 온건한 입장에서 개국 후 태조 3년에 쓴 『심기리편(心氣理 ))』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이단배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통치이념적인 측면에서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조선왕조 개국을 통해 구질서 청산과 신질서 수립을 위해서는 통치이념의 전향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려시대에 뿌리내린 불교는 무기력하고 부패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에 적합한 통치이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얻은 주자학을 세우기 위해 쪽불론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는 기존의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그저 창왕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서 그들을 여승 신유의 아들로 운전하여 붙이고 여기에 반대하는 그의 스승 이색에 대해서까지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데, 이는 명분상으로는 황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겠다는 의도를 깔았으나 사실은 고려의 부패한 사회상과 무기력한 통치 분위기를 불교와 관련하여 함께 제거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실제로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불사에만 몰두하여 신돈에게 후궁과 관계를 갖게 하고 창을 낳게 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우왕과 창왕의 제거가 필요했기 때문에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의 제거와 불교의 배척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이색 등 극소수를 제외한 당시 주자학자 대부분이 우왕·창왕의 추방에 동조하게 했습니다.

셋째, 정도전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주자학적 통치이념이 국가사회윤리 전반에 걸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시말잡변』에서 제시했듯이 불교 자체의 인륜을 무시하는 교리는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교의 교리 자체가 인륜을 버리고 부자, 군신, 부부 등의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넷째,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선결 요건이 민심을 얻는 것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민심의 식생활 안정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토지겸병으로 인해 백성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토지개혁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토지개혁의 방해세력의 하나로 불가의 사찰전을 꼽고 있습니다.

그는 불가에서는 하는 일 없이 옷과 음식을 소비한다며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국 1년 전 그의 주도로 사찰전 등을 몰수하고 과전제를 중심으로 한 토지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사원전 폐지는 사원경제로 인한 국가재정의 피폐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정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무위도식하는 사회윤리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다섯째, 그가 '불씨잡변'이 나올 때까지 점차 배불론을 강화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성계가 개국 후 무학을 왕사로 삼고 조구를 국사로 삼아 여러 불사를 지내고 흥천사를 창건하는 등 숭불로 기울었고, 한양의 정도 과정에서 그는 무학과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권 내부의 갈등과 같은 정치적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한연우는 <불씨잡변>이 저술된 태조 7년이 정도전이 요동공격운동을 급박하게 추진하면서 실권(특히 병권)을 수람한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정도전의 배불론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나왔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외에도 조선조 개국 이후 그의 신분 상승과 병행하여 그의 어머니가 사노 출신이라는 일종의 신분적 열등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배불론이 단순히 개인적 정치적 이해관계만으로 재기된 것이 아님은 이미 그의 불씨잡변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이상과 같이 정도전의 불교 배척 이유를 통치·이념적 측면, 윤리적 측면, 재정·경제적 측면, 정치적 측면 등 종합적인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초기 온건한 입장에서 점차 강경한 입장으로 전환한 데에는 그가 죽기 2~3개월 전에 완성한 『불씨잡변』에서 가장 강력하게 배불론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측면도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 개국에서의 구질서 청산과 신질서 수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배불론을 강화하였고, 이를 계기로 국가의 통치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의의 정치적 측면에서 배불론을 강화했다 하더라도 그가 요·순부터 공·맹·정·주에 이르기까지 유가적 척도에 따라 이단을 배척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유가 경향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도전은 불교나 도교 등의 교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에 있어서도 당대까지 권근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지식을 갖고 있음을 그의 심기리편과 불시잡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이기설에 관해서는 생략하고 그의 경세사상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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