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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고려말의 대유이색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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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대유이색

이색(李穡, 이~1328~1396)은 충숙왕 15년 영해괴시마을(경북 연일지방)에서 정주학자이자 대시인인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왜소하고 하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저 때부터 유별나게 총명하여 한 번 읽은 것은 금방 외우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유학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학우였던 이제현에게서 배웠고, 14세에 성균관 시험을 치르고 급제하여 원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의 권유로 원에 들어가 3년간 국자감생원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중국의 고전과 성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4세 때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유가의 예에 따라 3년간 복상하였습니다.

그는 공민왕 원년 그의 부친의 복중기간(25세 때)에 이른바 복중상소를 올려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첫째는 토지구획을 바로잡아 분배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는 전제개혁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왜구의 침범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용맹한 무사를 키우려는 국방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정몽주도 나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이색 국방계획에서 제시된 것과 유사한 진법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셋째, 교육의 진흥과 인재의 육성에 관한 것으로 넷째, 불교의 지나친 번성으로 인해 놀고 먹는 사람이 많아지고 국가 재정도 어려워지므로 도첩제를 실시하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에 편입하여 복무하게 하고 신설한 사찰은 철폐하도록 하는 불교 억제 정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1353년 원나라 정중행서 향시에 장원 급제하여 원나라 장관으로 들어가 원나라 관리가 되었고, 중국 구양현 왕사성과 같은 대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원나라 내정이 불안정하여 한족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29세에 원나라 관직을 포기하고 완전히 귀국하였습니다.

공민왕 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시작되자 그는 이 부랑으로 승진하여 다시 시정팔사에 관해 상소를 올리고 개혁을 건의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대부분 복중상소에서 제기되었으나 최충헌 무인정권 시절에 만들어져 인사권을 전횡한 정방을 폐지하고 유가경전 주례에 나오는 육전체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점 등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공민왕은 이를 받아들여 정방을 폐지하고 이색적인 이부시랑 겸 병부랑중에 임명하여 문관과 무관 전형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공민왕 14년 신돈이 정권을 잡고 개혁정책을 수행할 때 그는 교육과 과거 제도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고시 과목에 경학을 채택함으로써 신흥 유학자인 윤소종·이첨 등 많은 개혁론자들을 등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1367년 공민왕 16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김용구, 정몽주, 박상춘, 박의준, 이승인 등 쟁쟁한 학자들을 교관으로 뽑고 정주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초 수십 명에 불과했던 관생이 이색 학칙을 정하고 국가 지원 예산도 늘리면서 관생 수도 대폭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매일 경전을 강의하면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학문을 토론함으로써 비로소 정주성리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 20년(1371)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주도하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사망하자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우왕이 즉위한 후 우왕의 간절한 요청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몽골 사막으로 쫓겨나 북원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고 중국은 명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고려에서는 명 태조에게 우왕의 계승에 관한 책봉을 요청했으나 10년이 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가 80년간이나 원래의 부마국이었기 때문에 원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때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을 고려 정부에서 호송해달라고 보낸 자가 도중에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로 도망간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더욱 고려를 의심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책봉을 불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왕 10년(1384) 정몽주가 명제 탄생을 축하하는 성절사를 다녀온 뒤부터 명제의 감정이 완화되어 일년 후 책봉사를 보내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때 책봉사로 온 사람들이 고려에 들어와 먼저 이색 안부를 물었는데, 이는 이색 문명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왕 12년 이훈훈은 지공거(고시관)가 되고 맹사성 등 33명을 뽑아 우왕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명나라는 우왕의 책봉을 허가하는 대신 고려에 대해 매년 말 천필, 김백근, 은만냥, 모시만필을 바쳐야 한다는 세공을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그것을 약속했지만 그 부담이 너무 커 일부분만 바쳤습니다. 그리고 명제는 고려를 질책하여 요동에 정요위를 설치하였고, 철령이 북쪽 땅을 명나라가 관리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왕은 이색 등의 주화론을 물리치고 요동공격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왕 14년 정월에 요동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이성계, 조민수 등이 모의하여 6월에 철군을 단행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단행된 후 이색 문화시중에 임명되었습니다. 그것은 회군 주동자의 명분이 이색 주화론과 일치하고, 또 그의 정치적 비중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최영을 체포하고 우왕을 강화도 그리고 후왕 문제로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견을 보이자 조민수는 이색적인 의견에 따라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했습니다. 이에 이성계파에서는 불만을 품고 대사헌 조준에게 조민수를 탄핵하고 창녕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창왕 책봉 문제 때문에 고려 집정대신이 직접 와서 명제를 만나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에 이색 문화시중으로 늙고 병든 몸으로 명나라 서울 금릉에 가서 명제를 만나 두 가지를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는 창왕의 입조였고 다른 하나는 명나라 고려에 대한 감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청의 의도는 창왕의 왕위를 확고히 하고 고려조의 정변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명제는 고려의 복잡한 속사정을 알고 곧바로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색적인 주원은 왕권을 보호하려는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자체는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그에게 자주적인 국가의식이 결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점이 그의 온건주의적 개혁노선과 맞물려 그가 왕권 내지 소수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그는 급격한 토지개혁에도 반대했고 불교에 대해서도 다른 성리학자들과 달리 비교적 관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색 명제로 드린 주청 이후 고려조는 이색을 지지하는 파와 그 반대파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면서 서로 상대방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창왕 원년(1389) 9월 권근이 창왕의 친조를 청하여 목숨을 걸고 명제를 유지받아 가져왔습니다. 이색반대파는명제의유지를명실록에기록되어있는것과달리왜곡날조하여신씨인창왕을추방하고왕씨를세워야한다고떠들어댔습니다. 이에 황려부에 갇혀 있던 우는 분개하여 자객을 보내 이성계를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붙잡혀 죽었습니다.

이로써 창왕도 폐하고 서인이 되었고 이성계가 처음부터 세우려던 요나라가 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이것이 공양왕입니다. 이성계를 지지하는 오사충 등은 우선 이색 제자인 이숭인을 불경불효죄로 탄핵하고 그를 변호하려는 권근까지 유배하여 이색도금저의 음모, 즉 변안열, 이림, 우현보, 김저 등이 우왕복 위음모에 가담했다는 탄핵 상소를 받고 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조선조 건국 이후 처음으로 유배에서 해방되게 되었습니다.

이색적인 철학사상은 장개의 성리학을 받아들였지만 아직 정주학의 이기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천지는 기이고 사람과 사물은 이 기를 받고 태어난다"며 서양의 탈레스처럼 사람을 포함한 생명체는 모두 물의 기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물의 모양과 색깔이 있어 천지 사이에 모여 사는 것은 모두 물을 베고 있습니다. 왜 사람뿐일까요? ··· 금수나 초목도 물에 의지해 태어납니다. 비록 비와 이슬이 키워준다 하더라도 물기가 그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그는 우주론에 있어서는 장재의 기론과 같은 입장을 취했지만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에 무극의 태그가 있었다는 주동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는 하늘이 옳다는 입장을 취하고 사람의 법도와 사물의 법칙이 여기서 나온다는 점에서 인사에 대한 하늘의 주재 기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경세론에서 그는 유가 경세사상을 수용하고 덕치 인정을 정치의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도적 개혁도 강조했습니다. 그는 앞서 보신 것처럼 복중상소와 시정 8개사와 같은 상소문을 통해 제도개혁을 제안했습니다. 공민왕은 정방 폐지, 사원 경제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도첩제 실시, 부모의 복상을 3년제로 해야 한다는 등 많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개혁사상은 그의 인사정책을 통해 신돈의 개혁정치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론은 주희의 개혁 정책과 마찬가지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불교의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배불론에서 정도전·김초·박초처럼 강경하게 전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온순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불교 교리 자체는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유교와 동일하다고 생각되었고, 또 당시 집권층과 공민왕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색 전제개혁을 주장했지만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지는 않았고 사전폐지도 반대했습니다. 이는 그가 당시 집권층의 이익을 고려해 온건한 계획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창왕 원년에 조준 등이 계획한 토지개혁에 대해서도 그는 권근·우현보 등과 같이 철저히 반대하였는데, 이는 기득권층의 이익은 물론 고려의 존망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색 대지주를 옹호하고 사전 폐지에 반대한 토지제도에 관한 입장은 사전 폐지를 통한 토지개혁을 통해 그 성립의 토대를 마련한 조선조가 세종대에 이르러 향촌 내 지주 중심의 운영을 내용으로 하는 사창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역사의 반전으로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사창제도는 주자가 제창하여 송나라에서 시행한 제도로 국영 의창과는 달리 사창은 사단위 지방의 곡물 대여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제안한 것은 이색적인 영향을 받은 그의 손자인 이계전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이 색은 고려말 무신정권과 원나라의 침략으로 어수선했던 고려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가이며, 또 말년에는 이성계 일파와 싸워 무너져가는 고려를 지탱하고자 했던 대정치인으로서 성균관을 활성화시키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대유학자로서, 그리고 명나라에까지 그 문명이 알려진 대문장가요대 시인 13)으로 고려와 조선조를 가르는 학계의 큰 분수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권근, 하륜, 이첨, 변계량, 김종직과 같은 제자들을 통해 조선 태종 이후 조선 왕조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조선 왕조의 유학 사상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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