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충의사상과 외교활동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 쓰러져 가는 고려를 지키려다 이성계 일파에 제거된 충신으로 널리 알려져 중국 송나라 유송과 명나라 문천상에 버금가는 충신으로 정표되어 왔습니다.14)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래 노골적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문화시중으로서 그를 억제했습니다.
그는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 낙마해 병상에 눕자 자파 김진양 등을 동원해 조준·남이·정도전 등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인 조영규 등에 의해 격살되고 역적으로 저자에게 효수되었으나 8년 후 이방원이 등장하자마자 아이러니컬하게도 만고의 충신으로 둔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태종이 그를 불사2군의 표상으로 세움으로써 조선왕조의 정권을 영속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신관에 대해 남효원, 종구, 조식 등은 일찍부터 의심해 왔으며 특히 일본사가 중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우창의 폐위에 동조하고 폐출의 공로로 이후 문하시중에 추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와 장의 폐위에 대해 그의 스승 이색과 그의 제자인 길재는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이색은 정도전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길재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야인의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정도전, 윤소종의 무리에 동조하여 9공신의 한 사람으로서 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일부 일본사가(경성제국대학 교수)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와 장이 왕통이 아니라는 점에서 도학정신에 투철한 그로서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정나라로부터 보호하려는 도학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명나라 철령위 설치에 의한 요동공격으로 표면화된 친원 친명 사이에서 학문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사회개혁과 친일외교를 주장하는 이성계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무너져가는 고려의 사직을 이성계와 정도전의 무리에게 넘기지 않도록 하는 더 큰 충의로 재상직을 맡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몽주는 유교의 충의정신을 위해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또 충신으로 조선왕조 500여년간 충신의 사표가 되었고, 그는 또 약간의 나이에 친상을 입고 한국 최초의 여막에서 3년을 지내며 애도한 효자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몽주 등 사대부의 유교적 예속의 실천과 보급을 위한 노력은 공민왕 9년(1360) 백관에게 3년상을 치르라는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강제 실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그의 스승 김득배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효수에 처하게 되자 그의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르고 장례의 항소를 행하였고 결국 스승을 노부히코로 삼아 사제의 길을 실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몽주는 이처럼 충효, 의리실천의 정신이 투철하여 그 충은 단순한 불사2군의 협의적 충이 아니라 경세사상이 뒷받침한 의리수호적, 사생취의적 광의의의 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는 과거 이색적으로 인해 '동방리학의 조'로 추인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가 성균관에서 주희의 『사서집주』를 강의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허병문의 『사서통』이 입수되면서 그 내용과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기대승에 의해 확정된 도통관도 정몽주로부터 시작되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광필→조광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근에 따르면 이색이 당시 유종의 위치에 있었고 그 위에는 이제현이 유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근은 그의 학통을 이을 만한 사람은 길재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길재는 정몽주의 학통을 이었다기보다는 권근의 학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몽주의 성리학설은 그의 저서인 『포은집』이나 『고려사열전』 등을 통해 보건대척불론 등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를 한국유학의 도통의 연원으로 삼는 것은 의리실천을 중시하는 사람들로서는 그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당시 유종의 하나로 여겨졌던 거유인 이색적인 한때 그를 동방리학의 조조라 할 수 있다는 칭찬도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한국유학의 연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는 주자학에 대한 이론적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실천적인 면과 특히 외교와 국방과 같은 경세적인 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재상을 지내면서 그동안 불법에 따라 지내던 상제를 고치고 고치려는 가례에 따라 가묘를 짓고 신주를 만들어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유가의 예속을 일반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성에 5부학당을 두고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고 섬학전을 통해 유가적 인재육성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는 이처럼 불교문화를 유교문화로 전환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숭인 등과 함께 몽골의 복장을 고쳐 중화 복장을 따르게 하고 몽골 지배의 풍속을 중원문화로 바꾸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했고, 그 자신도 의리실천을 중시한 것은 이미 먼저 살펴봤습니다.
정몽주는 외교에서도 고려 말 명나라와 일본의 복잡한 외교관계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공민왕 때 이미 명나라 세력이 원나라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17년(1368) 주원장이 명을 세우자 2년 후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친명정책을 폈으나 우왕 즉위한 후 다시 친원으로 기울어지는 등 원나라의 조서를 받거나 이름의 연호를 쓰면서 국시가 일정치 않아 신하들도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그는 이첨, 정백영이 친원파 이인임 등을 탄핵하자 여기에 사림이 동조하였고, 그도 관여하여 친원파에 의해 언양으로 귀양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공민왕 22년(1371년) 처음으로 서장관으로 명에 이르렀고, 우왕 6년(1380년) 정당문학으로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 하였으며, 이때 풍랑에 함께 갔던 사신 일행이 모두 죽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사신으로 간 홍상재가 명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받고 유배되는 등 험악한 분위기에서 아무도 명나라에 성절사에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왕 8년에 명나라 성절일에 참석하기 위해 조정의 명에 따라 성절사에 갔습니다. 이때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은 정몽주가 공민왕(1371) 때 처음 사신으로 갔을 때를 기억하여 화를 풀고 홍성재 등을 석방시키고 5년간 머물렀던 세공까지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충정왕 2년(1350)부터 일본은 해안지방뿐만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대규모로 쳐들어와 약탈해갔습니다. 임금 때는 더욱 심각하여 378회에 이르는 침입이 있었고 조정에서는 천도론까지 대두되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력으로 격퇴하거나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했습니다. 공민왕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우왕 3년(1377)에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언양으로 유배되었던 정몽주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정몽주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그들에게 고금 교린의 이해를 전하고 그들을 탄복시켜 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그의 일본 외교 성과는 컸지만 일본 정부의 지방 통제력의 한계 때문에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는 국방에도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투에도 참가하여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는 문인이면서 우왕 6년 이성계를 따라 운봉에서 왜구를 대파하였고, 공민왕 13년에는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 삼선 삼개를 화주에서 격퇴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들의 병진법을 알아보고 돌아와 왜구를 상대하는 남방전에서는 북방전과 같은 장창과 활로 싸우기보다는 산성을 축조하고 봉화를 설치하여 적의 내침을 미리 알리고 인마와 재물을 산성으로 피난시키고 험한 요새를 이용하여 적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전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밖에도 경세가로서의 그의 업적은 의창을 세워 가난한 백성들을 진휴하고 수삼을 설치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사전을 폐지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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