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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유가적 민본사회건설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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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적 민본사회건설

유가의 목표는 수기치인입니다. "대학"은 그 목표를 격물, 치지, 성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이 8조 중 "대학"의 종국 목표는 평천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8조목 중 격물에서 수신까지는 수기의 과정이고, 여러 집안에서 평천하까지는 치인의 과정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유가 학문의 목표는 이처럼 수기와 치인이라 할 수 있지만 선진유가에서는 치인에 중점을 두고 신유학(성리학)에 이르러서는 노·불의 영향을 받아 수기에 더 많은 관심을 쏟으며 인성론 탐구에 집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성리학은 선진유학의 재해석이고 그 체계화를 목표로 한 이상 그 근본목표도 치인 즉 평천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에 있어서도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진정된 곧 경세에 있었고, 그의 경세론의 종국적 목표 역시 동맹유가경 여론에 제시된 바와 같이 민본사회 건설에 있었습니다.

유가의 민본사상은 『상서』에서 기원하였는데,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맹자에서 비롯됩니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왕이 가장 공경한다"며 "백성을 얻으면 이는 천하를 얻는 것"이라 하여 민본 사상을 본격화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민본 사상에 입각하여 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왕위에서 추방하는 방벌론 즉 혁명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맹자의 민본사상은 유가경세사상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한국유가경세사상에서는 정도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맹자의 이러한 형벌·선양사상은 실제로 조선왕조의 건국과정에서 절묘한 방법의 혁명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론을 바탕으로 그의 경세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백성으로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음식으로 하늘로 삼습니다. 따라서 소변 영역을 가볍게 하고 속세를 적게 하여 그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하며 불행하게도 홍수·가뭄·서리·해충·태풍·우박 등의 피해를 입으면 그 피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하여 부역을 줄이고 면제하는 것은 그 근본을 두텁게 하자는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처럼 국가의 근본을 백성이라는 민본국가관과 또 부역을 줄여 백성들의 생업에 여유를 갖게 해야 한다는 위민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백성이 군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개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게 의존하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자 군주의 하늘입니다. 그래서 『주례』에 백성의 호적을 군주에게 바치자 군주는 절을 하면서 받았는데, 이는 자신의 하늘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입니다. 왕이 된 자가 이런 뜻을 안다면 그 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정도전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유가적 민본국가의 근본이념에 따라 백성을 하늘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군주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애민관은 모든 정치사상이 지향하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특히 유가경세사상에서는 유가의 근본이념인 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가경세사상의 민본사상은 백성에 의해 국가권력이 창출된다는 민권사상이나 서구적 의미의 국가계약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가의 근본이념인 인을 국가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유가에서는 이러한 인의 개념을 사회도덕규범에 적용하여 '애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유가에서도 인을 만물의 생의로 보고 27 천지만물은 모두 인을 가지고 생생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생에는 반드시 사랑이 뒤따르며 따라서 우주 전체가 생생한 이치로서의 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유가의 정치사상은 인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인정을 핵심으로 하는 애민·위민·민본 정치를 필연적으로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도이러한유가적민본사상의기본적이념인인의실현을형이상학적측면에서이해하고있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의 큰 보물은 위요, 천지의 큰 덕은 삶입니다. 무엇으로 위를 지키는 것일까요? 인입니다. ··· 천지는 만물에 대하여 생육하는 것을 하나로 할 뿐입니다. 대개 그 일대의 기가 주류여서 만물이 생깁니다. 만물은 이 기운을 받아 굵지도 가늘지도 높지도 낮지도 저마다 그 형상을 형성하여 본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에 둔다고 합니다. 이른바 만물을 낳는 마음이 바로 천지의 큰 덕입니다. 왕의 지위는 존귀하지만 천하는 지극히 넓고 백성은 지극히 많기 때문에 한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개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두려워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어도 지모로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잃으면 배신하고 따르는 그 간격은 털끝만큼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사적인 의미이지 허술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길을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역시 인으로서만 얻을 뿐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첫머리에서 <주역>을 인용하여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려는 마음을 인으로 보고 군주도 이런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이른바 인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주가 인정을 하지 않으면 군주는 천리의 대행자로서의 자격을 잃고 민심은 이반하여 그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도전은 민본국가 건설의 초석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가경세사상에서 민본과 인정은 전통적으로 체와 용의 관계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민본은 민주국가든 군주국가든 모든 통치의 요체로서 그 존립근거지만 인정은 통치의 혜택이자 그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은 군주정치체제처럼 수직통치방식에 적합하여 군주의 은혜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고 민심이 떠났을 때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각각의 항을 바꿔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③ 인정과 위민 정치입니다
인정의 기본 정신은 공자의 '인'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인정이라는 용어는 맹자가 처음 사용하였고, 그 내용도 그가 본격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동맹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실천의 토대를 그들보다 앞서 나온 유가경전 『주례』에서 찾고 있습니다.

본래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이란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 즉 애민정치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인정, 즉 애민정치는 그 통치의 성격에 있어서는 덕치와 예치를 의미하지만 그 내용과 목표에 있어서는 위민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토쿠지와 레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들과 위민정치의 관계는 어떠한지 알아보겠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것을 정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형으로 다스리면 백성은 죄를 짓지 않으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고치면 백성은 부끄러워할 수 있고 선함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보면 본말 경중의 순서를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정도전은 공자의 말을 인용해 덕치와 예치가 인정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본국가의 본령은 다른 유가경세론자들처럼 덕치와 예치에 의한 인정에 있다고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만으로는 위민정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치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형벌과 법치의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안정과 제도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정도전에 따르면 우선 인정의 요체는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일정한 재산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을 사용할 때 농사의 시기를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하고, 동료와 세금을 경감시켜야 하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그는 입는 것과 먹는 것이 풍부해야 염치를 알고 창고가 열매를 맺어야 예의가 일어나고 태평성 업적은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정도전은 이렇게 일정한 재산을 갖도록 하는 것이 위민정치의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백성에게 일정한 재산을 주는 방법은 주택과 토지라고 보고 있으며, 주택과 토지는 백성들의 생업의 근본이라며 그가 주도한 토지개혁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관청이 전지를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경작을 주었지만 백성들의 경작은 모두 관청이 주는 전지였습니다. 당시 천하의 백성들은 전지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고, 경작을 하지 않은 자도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빈부의 강약이 크게 치우치지 않고 그 전지의 배출이 모두 관가에 들어가게 되면서 나라 또한 부유해졌습니다. 하지만 전지제도가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점점 힘들어지고 나라는 가난해졌습니다. ··· 고려시대에 이르러 전지제도가 점차 문란해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건달하고 심지어 도둑이 되었으므로 그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뜻을 같이한 2, 3대신과 함께 전대의 법을 강구하여 지금의 편의적인 방법을 참작한 후 경내의 전지를 조사하여 파악된 전지를 마지기수로 상공전, 군자전, 문무전, 역과전으로 나누어 왕실을 둘러싼 한량, 수절하는 과부, 향역리, 진도리에서 서민, 공장, 공역을 하는 사람에게까지 전지를 갖게 하였습니다."

위의 예문처럼 정도전은 전대의 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는 그가 제도개혁의 모델로 삼고 있는 주례에서 제시된 정전제를 고려한 것으로 보이며 일종의 토지국유화정책과 같은 토지제도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나 400여 년 뒤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처럼 치밀한 토지국유화제도를 제시할 수는 없었고 정전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고려 말 토지 병탐으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제거하고 국가 재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땅의 균분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도 정약용의 여전제에서 제시했듯이 병농합일의 장점을 인식하고 둔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그가 스스로 고백하고 개탄했듯이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세족 때문에 병농합일의 완전한 국유화를 시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생업의 근본은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유랑민들에게도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생업에도 도움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나라에서는 군량미를 비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위민정책 외에도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창을 설치해야 하고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혜민전 약국을 설치하고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도전의 인정은 단순히 덕치나 예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백성들에게 일정한 재산을 줌으로써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요역이나 세금 경감, 영농시기를 빼앗지 않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토지균분부터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인정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공자나 맹자의 견해에 따라 일정한 재산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일반 경세사상가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인 경세가로서의 그의 결단과 추진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④ 법치와 제도 정치입니다
정도전은 앞서 언급했듯이 민본정치는 왕도정치의 실현이고 왕도정치는 덕치 또는 예치를 근본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정이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정·주의 '성이 곧 이치'라는 설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을 기존 성리학설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가 현실적 악의 원인을 장재처럼 기질지성으로 돌렸더라면 기존의 성리학에 좀 더 투철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현실주의적 안목이 그에게 기이한 현실세계를 비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의 근원을 기질지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일정한 재산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상 공·맹도 인정은 오직 덕치나 예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일정한 재산을 제공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현실적으로 민생 안정에서 인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민생의 안정이란 덕치, 예치, 경제적 통치(백성을 배부르게 먹이는 것)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덕치를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는 형벌이나 법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오늘날과 같은 법치는 아니더라도 법치와 제도적 통치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옛날 성왕이 예를 갖추어 그 정욕을 절제하고 형벌을 내리고 그 음사를 제지한 것은 지극히 다스려 풍속을 아름답게 한 것입니다. ··· 대개 예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형에 처해지므로 예로는 바로잡고 형으로는 징계하는 것입니다."

위의 예문처럼 정도전 민본정치의 이상은 왕도정치이고, 그 실현은 전통적인 유가경 여론자처럼 덕치 내지 예치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보고 있으나, 그러나 질부를 위해서는 법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치를 책에서 법치를 말로 보면서도 <조선경국전> <헌전>의 여러 곳에서 형벌로 인한 법치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했고, 법령을 세워 호역, 전택, 혼인, 과정, 전채, 시전 등에 관한 상세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고, 또한 <조선경국전> 육전 중 <헌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전통적인 유가 경세 사상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현실적인 경세가다운 식견과 혜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경세가다운 발상에서 그는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등을 만들어 제도적 통치의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으며 조선왕조통치가념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이와 같이 위민정치를 위해서는 덕치 내지 예치는 물론 시의적절하고, 백성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필요로 하는 법치 또는 제도적 통치도 중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착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사람마다 갖게 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어찌 사람의 본성이겠습니까. 일정한 재산이 없는 자는 그로 인해 일정한 마음이 없어지고 춥고 배고픔이 몸에 닥치면 예와 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져 부득이한 상황에 핍박하여 저지르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백성의 어른이 된 자는 충분히 인정하여 백성이 생업에 안정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할 때는 농사를, 취할 때는 그 힘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정도전은 인간의 본성이 선량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환경이 인간을 도적으로 만든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덕치와 예치가 치세의 근본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법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백성들이 도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재산을 갖도록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요역과 세금을 경감하여 농업시기를 빼앗지 않고 그 음식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도전에서 이처럼 백성들에게 나쁜 환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백성의 실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위민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위민정치를 위한 제도적 통치에 관해서는 『조선경국전』에서 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재상제도에 관해서는 『경제문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인정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통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상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국과 한국 재상들의 행적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재상제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유가에서는 군주는 부모와 같은 자애로 통치해야 한다는 시혜적 애민 내지 위민통치를 주장하고 있으나 정도전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군주의 자질에는 혼미와 명석강약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군주의 자의적 통치보다는 법제도에 의한 정치를 이상적 통치로 보고 있으며 특히 군주를 대신할 재상의 통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도전에 따르면 재상의 직책은 위로는 음과 양을 조화시키고 아래로는 서민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백성을 밝고 평화롭게 하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진압하여 달래며 국가의 기록과 포상과 형벌 등이 여기에 묶여 천하의 정치교화 명령이 여기서 나오는 것 48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재상의 직책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가 일찍이 '도당에 올리는 글'에서 석개보의 재상직에 관한 글을 인용하여 제시한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음양을 조화시키다라는 어구를 독자적으로 신상필벌로 해석했습니다.이렇게 해석한 의도는 재상의 직책은 법질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녕을 기하고 내치를 통해 백성을 평화롭게 하며 외치를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포상과 형벌권을 행사하여 정치교화명령이 따르려면 신상필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재상의 기본적인 업무로 ①자신을 바르게 하고(정기) ②임금을 바르게 하며(격군(격군) ③사람을 조사하고(지인) ④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조치) 4가지를 꼽았으며 구체적인 세목으로 40여점을 꼽았는데 그 중요한 몇 가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2) 공평무사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장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요.
(4) 근면하고 근신합니다.
(5) 지성으로 신임을 얻으려면 굽혀 비위를 맞추지 않아요.
(6) 현명한 사람을 채용하여 불초자를 물리칩니다.
(7) 재상은 강직·명석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8) 정권은 재상에게 맡겨야 합니다.
(9) 재상의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하고 재임 기간은 길게 줘야 합니다.
(10) 재상은 용감히 물러나야 할 절조가 있어야 합니다.

정도전은 중국 및 한국의 역사를 통해 명재상과 그렇지 않은 재상을 선정하고 유가정신에 부합하는지를 통해 이러한 재상관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러한 정도전의 재상관은 한국의 유가경세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대승과 이이 등의 경세론에 나타나는 현명한 재상의 임용과 임기를 장기화하는 것 등은 유가경세론의 공통경향이기는 하지만 정도전의 재상관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특히 기대승의 <논사록>에서 제시된 책임정치 구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기 재상의 업무 영역 및 항에서 주장하는 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논의된 재상제도 외에도 대관, 감사제도, 군수, 현령 등에 관한 제도에 대해서도 『경제문감』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제도를 통한 통치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군주의 자질에 있어서 혼미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통치하기에는 군주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고 군주가 정사를 총괄하면 능률적인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군주가 정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정치의 능률과 책임정치의 구현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재상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몫이기 때문에 먼저 군주의 자질이 문제라고 보고 태조가 즉위하자마자 경연관을 설치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경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경제문감>에 이어 <경제문감별집>을 세우고 여기서·순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군주의 길에 관해 자세히 언급함으로써 인정의 근원이 왕도정치 즉 철인군주정치의 구현에 있음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정도전에 따르면 군주가 현명한 재상을 선택하고 제도적 통치를 통해 인정을 실현할 때 위민정치, 즉 그의 표현에 따르면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주나 재상 및 제도상의 문제나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으로 민심이 이탈할 경우 백성들은 새로운 군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혁명론이고 조선왕조 개국의 정당성을 보장하자는 이론입니다. 이제 다음 항에서 그의 혁명론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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