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역사적 의의
이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정도전은 먼저 조선왕조 개국 과정에서 유가 입장에서 이단 특히 불교를 배척함으로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확립하고 유가적 민본사회 건설을 기획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가 불교를 배척한 이유로 불가가 인륜을 무시하고 출가를 권장하고 무부 무군의 입장을 취하여 가정을 버린다는 비인륜적이라는 점과 불가가 무위도식하고 많은 노비와 사원천을 소유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망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불교의 교의 자체가 허무를 숭경하고 황당한 윤회전생 같은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지만 그의 초기 저술 <신문청답>에서 나타난 도·화에 대한 온건한 것입니다.
이후 그가 죽기 전 2~3개월 전에 쓴 <불시잡병>에서 배불에 대한 강도를 높인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성계가 개국 후 무학(無學)을 지난 일로 하여 족구를 국사로 두었으며, 여러 불사를 행하고 흥천사를 창건하는 등 숭불로 기울어져 한양 정도의 과정에서 무학화 마찰을 빚는 등 정권 내부의 갈등과 같은 정치적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적 입장에서 이러한 불교의 배척은 그의 유가 경세론과 함께 조선왕조 개국으로부터 통치의 이념을 제공하여 유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한편 그의 이단 배척사상은 조선왕조의 사상을 단조롭게 하고 학문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정통 유가 경세론에 입각하여 통치이념을 민본국가 건설에 있어서 덕치로부터의 예탁에 입각하여 인정을 전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본국가의 궁극적 목표는 위민정치에 있으므로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하였고, 전통적인 유가 경세사상에서 제시된 방법 외에도 많은 반대세력을 제압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경세 사상가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세가로서의 결단력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안녕을 위해서는 덕치 외에도 때로는 형벌과 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군주가 부모와 같은 자애로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군주의 자질에는 홍명강약의 차이가 있으므로 군주의 자의적 통치보다는 법제도를 통해 제도적 통치와 군주 대신 재상의 통치를 제시했습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제도적 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 경국천』, 『경재문감』, 『경재문감별가』 등을 지어 통치이념을 제도화하여 유교이념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조선 경국천』은 『주례』를 모델로 한 저서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그는 인민이 기본이라는 민본국가의 이상을 덕치에 기초한 인정을 전개해야 한다고 보더라도 한편으로 강력한 중앙국가의 제도적 통치를 기획하였습니다. 그의 강력한 국가 요건은 튼튼한 국방과 재정이었습니다. 그는 굳건한 국방을 위해 사병을 폐지하고 군권을 국가가 수렴해야 한다며 국방력 강화 70)와 전투력 배양 71)을 통해 실제로 태종 7년에는 요동 정벌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궁궐 제도를 검소하게 하고 국영을 절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가가 3년 쓸 저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다운 할 수 없다며 비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72) 이미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그는 대왕고래를 감면하여 국민의 생업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국영의 검소와 절약만으로는 국가가 지탱할 수 없음을 현실정치 참여를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직원이나 대지주로부터 권신과 같은 특정 부류의 토지의 겸병을 막고 세금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또 다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여 재정의 충실을 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금 생산과 판매에 있어 국가 청담재·산장과 수량(수량)의 국가 관리·산공세·성박세·황지 개간 등이 그것이다.73)
이처럼 정도전은 민본국가는 튼튼한 국방력과 재정이 뒷받침된 강력한 국가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 전체의 이익과 안녕은 강력한 국가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력한 법집행을 통한 통치가 국민 전체의 이익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중죄자를 "사형에 직면하여 다시는 사형수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것" 74)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정도전은 유가 경세사상가답게 치세의 근본을 덕치에 두면서도 현실적인 개혁가답게 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제도정치인이 뒷받침되어 견고한 국방력과 재정력이 수반되는 강력한 중앙국가 건설을 염원하고 있으며 이성계를 통해 그런 염원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왕조 개국혁명에서 맹자의 방벌과 선양사상에 입각하여 선양을 위장한 방벌방식을 통해 혁명에 성공하였는데, 그것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천인감응설, 또 재이설에 두고 있는 것은 선양의 방법과 함께 솔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유가적 경세론에 있어서 국가는 백성에게 근본을 두고 있으므로 군주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이 떠나면 군주는 당연히 사임해야 한다는 점에서 혁명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도 이런 원칙론을 알고 있었지만 선양을 위장한 반볼을 하기 위해 그로부터 횡행당한 제이솔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전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상 제이솔은 조선 후기 이익·홍대영 등 실학파들이 천체 현상을 제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기까지 군주의 왕도 정치를 독려하는 수단이 됐고, 개혁론자인 이이드 『천도본』의 상당 부분을 제이솔로 채운 바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공양왕을 제이솔에 기초하여 선양의 형식을 취하여 폐위시킨 것은 정치 논리적으로 보아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위장된 선양보다는 방벌의 형식을 취하고 혁명을 행했다면 민심이반이 곧 범벌울 수반된다는 교훈을 후대에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래에 따른 방벌론은 후대의 군주들에게 선정을 촉구하는 교훈을 줄 수는 있지만 민심이반 현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잦은 방벌혁명이 일어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하고 군주의 은혜적 의정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유가경세 사상에도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양을 가장한 방벌을 불가피하게 채택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왕조의 장기적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도전은 유가적 경세사상을 계승하여 유가적 민본국가 건설의 토대를 제공하고 유가의 이념에 따라 덕치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또한 법치를 병행해야 진정한 위민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군주의 자의적 통치보다는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통치를 바람직하게 보고 실제로 재상제도 확립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또 사병을 폐지하고 국가의 군권을 강화하며 토지제도 등을 통한 국가재정 건전화를 기획함으로써 강력한 중앙국가 건설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따른 새로운 이념을 제공하면서 조선 사회를 주자학적 유교 사회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듯 정도전은 정치, 사회, 경제, 사상사적 측면에서 후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후대 경세사상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경세사상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유학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교와 국방관, 인재양성과 학술진흥 (0) | 2022.08.26 |
---|---|
조선 개국과 방벌 선양사상 (0) | 2022.08.25 |
유가적 민본사회건설 (0) | 2022.08.21 |
조선조 개국이념, 이단배척과 숭유정책 (0) | 2022.08.20 |
정도전 불운한 출생성분과 부당한 평가 (0) | 2022.08.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