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유학의 역사

정도전 불운한 출생성분과 부당한 평가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19.
반응형

정도전 불운한 출생성분과 부당한 평가

정도전(1337-1398)은 경북 영주시에서 아버지 정운경과 서어 출신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런 출신 성분 때문에 그는 동창생 수학을 하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정은경이 이색 친구였던 관계로 그는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그곳에서 정몽주, 이승인 등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외가와 처가가 미천했기 때문에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세하기 위해 당시 외방에만 다니던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조선조 개국이념을 수립하고 조선조 통치의 골격을 쌓은 조선조 개국의 일등공신이자 한국유가경 여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후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그가 두 왕조를 섬기고 새로운 왕조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중국의 이윤에 대응하는 인물임에도 이윤은 현인으로 유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 온 반면, 그는 학계로부터 도외시 내지 멸시를 받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림파 유학자들은 성종조 이후 점차 득세하여 한국주자학의 본류를 형성하고 의리수호를 중시하여 정몽주를 충신으로 부각시킨 반면 정도전은 변절된 것으로 간주되어 한국주자학의 도통에서도 권근과 함께 제외되었습니다.1)

둘째, 정도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출생성분에 처가 및 외가 측면에서 노비 및 서자 출생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자학적 신분사회에서 경원시 내지 멸시를 당했습니다.2) 1392년 봄 이성계가 사냥으로 낙마하여 병상에 눕자 정몽주, 김진양 등은 정도종을 탄핵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때 이들이 내세운 탄핵의 주된 이유가 그의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서어 출신의 관가진출을 억제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에 대한 원한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의 출생성분을 폭로한 것으로 보이는 우현보 일가를 그가 비정하게 제거한 냉혹한 행동이나 우왕창왕의 폐위를 반대한 자신의 스승 이(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등 그의 과격한 행동은 이색 문인들이 조선조 초기 학계를 지배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더욱 좋게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조준과 함께 실행한 전제개혁안은 지주 전호제를 철저히 부정했기 때문에 대지주는 물론 동료주자학자 중에서도 권근과 같은 신흥권력층 대부분의 찬동을 얻지 못하고 사찰전을 몰수함으로써 사찰경제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왕자의 난에 휘말려 태종 이방원에게 패했고 태종의 근위세력인 이첨, 권근, 하륜 등에서도 외면받았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관학파의 기둥이었고, 앞의 두 사람은 겸 성균관대사성을 오랜 기간 역임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지공거(고시관)를 오래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는 역할을 해 이들에 의한 부정적 평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정도전 일파의 탄핵을 받았다는 점에서 정도전에 대한 원망이 컸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하는 데 주저했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성계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고천상·맹호성 등 이른바 두문동 72현 등을 불을 질러 몰살하고 왕씨 일족을 수장, 공양왕까지도 사람을 죽이고 제거하는 등 이성계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일반 여론3)이 왕위찬탈의 총참모였던 정도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 유가에서 가장 통렬하게 불교를 배척, 공격하여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억불숭유정책에 정착시키는데 기여하였음에도 불가는 물론 대부분의 유가에서 철저히 배척당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사림파를 계승한 도학자들은 중국의 척불론자인 당의 한유에 대해서는 척이단을 내세우는 맹자나 정주학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정도전에 대해서는 한국의 유가도통에서 제외하고 오늘날에도 그의 유가사상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연구가 있을 뿐 4)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5) 그러나 그는 정주성리학에 매우 밝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세사상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국의 유가경세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그가 주례를 그의 경세사상의 모델로 삼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유가경세사상의 일반적 특징이며, 한국 유학에서도 조선조 초기의 변계량·양성지는 물론 조선조 후기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주례』를 경세사상의 모델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둘째, 그가 맹자의 방벌과 선양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개국을 합리화한 것은 그의 경세사상이 유가경세사상의 본원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혁명적 방벌론은 조선 중기 조식과 후기 정약용의 방벌론에도 반복되는 정치사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그의 경세론에서 민본주의의 사상적 본원인 천명사상·재이설 등은 주자학의 전통적 경세사상이자 우리나라 유가경세사상가의 단골 메뉴였습니다.

넷째, 그가 강조한 언론개방과 여론중시사상은 조광조, 이이 등 모든 한국의 유가경세사상가들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현명한 재상등용과 재상중심의 통치를 역설한 것은 그의 경세사상이 기대승의 <논사록>에서 제시된 재상의 책임정치론으로까지 번져 한국의 유가경세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재상중심제도의 강조는 태종 및 세조에 의해 한때 좌절되었으나 그로 인해 제시된 재상제도는 조선왕조 통치구조의 큰 틀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세사상 외에도 조선조의 창업공신으로서 조선조의 개국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조선조의 제도정치의 기초를 닦았으며 한양 천도를 단행하여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궐과 궁궐의 이름은 물론 8대문과 성내 48방의 이름을 스스로 세우는 등 조선조의 기초를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진법의 진도를 만들어 장병들을 훈련시키거나 명태 조주 원장이 정조표 전문 내용이 명나라를 모독하는 문구가 있다며 그 표 전문을 만든 정도전을 잡아 보내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을 때 그는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자신이 만든 진법에 따라 군사 훈련을 시켜 아쉽게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우리는 정도전을 한국 유가경세사상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한 인물로, 그리고 전환기의 대경세가로 재평가하고 그의 경세사상을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