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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

조선 개국과 방벌 선양사상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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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개국과 방벌선양사상

정도전은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민본사상을 기초로 하여 인정, 즉 애민정치, 위민정치의 필요성을 이끌어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종국적 목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가 백성을 위한 통치가 되지 못하고 민심이 군주를 떠났을 때에는 그 군주는 이미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지위는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백성은 지극히 많기 때문에 한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일이 생기게 됩니다. 백성은 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해서는 안 되며,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지모로 속여서는 안 됩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백성은 그를 배제합니다."51)

여기서 보듯이 정도전은 민심을 얻지 못하면 군주는 그 통치권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백성들은 그 군주를 제거하는 이른바 '유가 방벌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벌사상은 맹자에 의해 제기되었고, 순자가 이를 계승하여 그 정당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맹자는 임금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거듭 간해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바꿔버린다며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이 걸왕을 축출하고 무왕이 주왕을 축출한 것에 대해서도 그들이 인의를 저버린 잔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을 살해한 불충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이러한 형벌의 정당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요하순으로 선양한 것에 대해서도 후대인들은 회의적으로 비평하기도 하지만 그는 요하순으로 왕위를 부여한 것은 하늘이 민심을 대신하는 것이며 따라서 백성들이 왕위를 부여한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며 선양의 정당성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순자도 물이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며 방벌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그것을 비판하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것은 유교의 윤리규범에 위배되기도 하지만 전제군주 밑에서 그것을 다루기가 일반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에 의해 방벌의 정당성이 반청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되었고, 한국에서는 16세기에 남명이 방벌의 정당성을 인정하였고, 18세기 정약용은 선양 못지않게 방벌의 정당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정도전은 군주가 다른 유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의 사례를 요나라가 자신의 아들 단주 대신 차례로 왕위를 물려준 데서 찾고 있으며, 방벌의 대표적인 사례를 하의 걸왕이 말희와의 사랑에 빠져 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은나라 당왕이 이윤과 함께 걸왕을 때린 것과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때린 데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방벌보다는 선양을 바람직한 왕위계승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그가 조선왕조의 개국에서 이윤의 역할을 하고 공양왕을 축출할 때 선양의 방식을 채택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방벌사상에 기초한 그의 혁명론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정도전은 <공양왕께 드리는 상소>에서 공양왕의 재변이 일어난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교서에 대해 상벌의 불공정성과 벗과 창을 옹립한 이색, 우현보 등을 옹호한 점, 불교신앙에 대한 재정적 과잉지출 등을 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배불론자답게 불교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불교도량은 궁궐 안에 높이 솟아 있고 법석은 불당에 항상 설치되어 있어 도전으로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고 무당의 제사는 난잡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좋은 일이 아님을 모르고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번창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모르고 백성들을 오래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을 더 가난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특히 그는 혁명이 성공한 후에 쓴 <경제문감별집>에서 공양왕이 물러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우화창으로부터 다시 왕씨의 왕통을 계승하도록 도운 충신과 의사에게 주효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충성을 받아들여 간하는 것을 용인하여 유신을 다스렸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친척, 여성, 환관의 부탁만 듣고 원훈을 멀리하고 충성을 다하여 선한 사람을 모함하고 정사가 흐트러지고 인심이 이반되어 천명이 저절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혁명을 일으킨 그의 솔직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술한 바와 같이 상벌의 불공정성과 불교신앙에 대한 과도한 재정지출 등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천명이 떠나고 천심과 인심이 감응하여 화를 불러왔다는 이른바 재사상으로, 그의 방벌론 즉 혁명론의 형이상학적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재사상이란 무엇일까요?

"재사상은 유교사상의 기본 신념인 천인합일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행위의 선악에 의해 자연이 재해나 변태를 초래한다는 사상으로 <홍범>63과 <주역>계사전64)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신유학사상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 때 동중서65에 의해 유가에 본격 도입되어 유교국가에서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유교 국가에서는 이러한 재사상에 기초하여 정치의 선정과 실상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았으며, 일식, 홍수, 지진 등의 재난이 발생하면 정치의 실정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여 공직자의 퇴진이 이루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군주의 실덕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나라 성제 때 재상 적방진은 화성이 전갈자리를 침범한 재위의 책임을 물어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고려 공양왕 때도 주)59에서 보듯이 객성과 화성의 운행이변으로 인해 공양왕이 직접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것도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정치와 재래에 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려가 패퇴하기 1년 전, 공양왕의 이 교서에서 공양왕 자신은 정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객성이 자미를 침범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자미는 천문학상 천제가 살고 있는 곳을 뜻하는데, 공양왕 자신이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그 교서의 내용이 공포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교서에 대한 정도전의 상서 또한 그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군주를 무시하는 듯한 오만한 면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대신들 사이에 혁명이 가까워졌음을 예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도전 혁명론의 근거가 되는 재이설의 형이상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도전은 천지만물이 있기 전에 태그가 먼저 있고 천지만물의 이치가 그 안에서 혼연히 갖추어져 있다고 하며, 또한 이치는 형이상이고 기는 형이하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정주학을 신봉하는 주리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비판에 있어서는 주로 주 이론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있어서는 개혁 사상가답게 주기론 내지 이기 일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후자의 입장은 그의 재사상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비바람과 춥고 더운 것은 나의 기요 태양과 달은 나의 눈입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과실이 있어도 내 눈이 미쳐 내 눈이 가려질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아프게 한 적이 많았습니다. 왜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저를 책망하나요? 여기서 나는 상제가 친히 자신을 지칭한 말입니다. 비바람과 한서는 하늘의 마음이 되고 해와 달은 하늘의 눈이 되고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라도 그 옳은 일을 잃으면 해와 달이 반드시 가려지는데 이는 사람이 천지를 병들게 하는 곳이 또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천지와 만물이 한몸과 같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옳으면 천지의 마음도 옳고, 사람의 마음이 착하면 천지의 마음도 순할 것이니 이는 천지의 재앙과 상서가 있는 것이 참으로 인사를 잘하고 잘못으로 인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정도전은 인간의 마음에 과실이 생기고 인사가 잘못되면 하늘 마음도 병들고 여러 가지 재앙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도전의 사상은 하늘과 인간은 기의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같다는 천인합일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천심과 인심이 서로 감응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과 인이 서로 감응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에 따르면 "마음이란 인간이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곳의 기로 허영불매하여 일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성이란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곳의 이치로서 순수하게 지선하여 일시에 대비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정도전에서 인간의 이치와 기는 하늘이 주었기 때문에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정을 펼치지 못하고 실정이 반복되면 인간의 음양지기가 조화를 잃고 민심이 이반하게 되고, 또 하늘 기도의 조화를 잃게 되어 비바람, 한서 등 여러 가지 재이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천심의 이반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도전에서 재리현상은 천심의 이반현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1391년에 나타난 재리현상을 혁명의 호기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혁명의 정지 작업으로 1388년(음(禑왕)14년)위화도 회군 이후 욱일승쵸은한 이성계를 도와서 1389년 무어 창원을 왕 씨가 없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 왕을 추대하고 왕권을 무력화시켰고, 1390년에는 명나라에 별 절사(성 때사)및 뵤은무사(변명 무사)에 가서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무고를 밝히고 이성계의 부모 묘적 성향을 부각시키고 1391년에는 조준(조준)의 전제 개혁안인 과전 법을 시행하도록 하고 구 세력과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백성들에게 균분함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고려조에 뿌리를 깊게 새겨졌던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함으로써 새로운 통치 이념을 제시하고 있었고, 이듬해에 조준, 남은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는 혁명을 단행하였습니다.

그 혁명 방식은 실제로는 방벌에 해당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선양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그와 그의 일당이 왕위전수방법에 있어서 밤보루이라는 폭력적 방법보다는 선양이라는 평화적 방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양왕 시대에 계속된 재이 있는 민심이 군주를 떠났다는 천심의 발로라고 보고 위화도 회군과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얻고 천명을 얻은 이성계가 왕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50여 명의 현직 관리와 놀이꾼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였고, 당시 국가 최고의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의 승인을 받아 공양왕이 사임하였습니다. 공양왕은 시루덕을 자인하고 선양 형식으로 이성계에게 왕권을 탕감해 주었으나 실제로는 이성계 일파의 강권에 의해 퇴위하게 된 일종의 방벌로 물러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의 배후 총참모자로서의 정도전은 이러한 방벌과 선양을 혼합한 절묘한 방법으로 조선왕조 개국혁명을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이익이 은나라 탕왕을 도와 자신의 선왕이었던 하나와의 걸왕을 반벌하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혁명의 주역이었고 혁명 후 실권을 장악하여 많은 제도 개선과 치적에 기여하여 후세 경세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한 사람은 불후의 현인으로 존경과 바치는 찬사를 받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아 병절한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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