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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의 역사15

고려말의 대유이색 고려말의 대유이색 이색(李穡, 이~1328~1396)은 충숙왕 15년 영해괴시마을(경북 연일지방)에서 정주학자이자 대시인인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왜소하고 하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저 때부터 유별나게 총명하여 한 번 읽은 것은 금방 외우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유학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학우였던 이제현에게서 배웠고, 14세에 성균관 시험을 치르고 급제하여 원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의 권유로 원에 들어가 3년간 국자감생원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중국의 고전과 성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4세 때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유가의 예에 따라 3년간 복상하였습니다. 그는 공민왕 원년 그의 부친의 복중기간(25세 때)에 이른바 복중상소를 올려 고려사.. 2022. 8. 17.
고려말의 유가경세사상 고려말의 유가경세사상 정방혁파, 과거제도 개선을 주장했습니다 이제현(益齋, 이제현 1287~1367)은 충렬왕 13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검교정승 바이너리(李 15)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성균 때 우두머리로 합격하였고 병과(병과)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시험관이던 권보가 그의 재능과 지혜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28세 때 성균악정에 이르러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왕인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여수(燧守), 염복( 趙福), 원명선(元明善), 조맹후(趙孟 () 등과 교류했습니다. 그는 1323년 충숙왕 10년 유청신·오잠(吳 ()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을 설치하고 원나라의 다른 성과 동등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그는 도당에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무너지게 되자.. 2022. 8. 16.
민족자주의식과 국방론, 성리학의 도입 과정 민족자주의식과 국방론 대체로 유가 경향론자들은 모의 내지 사대주의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최승로는 조선조 초기 유가경 여론자인 정도전·변계량·양성지 등 비교적 적중국에 대해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려 지배층이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의 풍속이나 문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중국의 제도는 따를 수밖에 없지만 사방의 습속은 각각 토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길은 당연히 중국의 것을 본받아 외설적인 것은 고쳐야 하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과 같은 제도는 우리의 풍속에 따라 사치와 검약의 중용을 얻도록 하되 반드시 중국의 것과 마찬가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 2022. 8. 15.
유학의 본격적 수용, 통일신라시대의 유가경세사상 유학의 본격적 수용 유학의 전래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한사군 설치를 통해서 본격화됐다고 말씀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승인 아래 통치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고구려 소수림 왕 2년(372)때예요. 이때 처음으로 유학 교육 기관으로서 학문(태학)을 설립하고, 유교 경전과 사서를 가르치고 있으며, 지방에는 각처에 경당(扃당)을 설립하고 유학을 보급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 이전부터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유가적 인재의 육성에 힘썼던 것으로 보여요. 시조 주몽은 후 왕(후 왕)에 길에서 다스리겠다고 유언했지만 이는 유가의 왕도 정치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에요. 백제도 건국 초기부터 유학을 수용하고 오경과 사소류과 제자 백가의 사상을 수입하며 국왕에게 건의하는 ..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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