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유학의 역사

조선조 관학파의 기틀 마련, 보수적 정치 성향

by 포스팅하는 남자 2022. 8. 27.
반응형

조선조 관학파의 기틀 마련

권근(1352~1409)은 공민왕 원년에 태어나 조선 태종 9년에 세상을 떠난 두 왕조의 공신입니다. 그는 명문 안동권씨의 후예로, 그의 고조부는 찬성사를 지낸 권만영이고, 증조부는 원래 성리학을 도입 보급한 학자 중 한 명인 정승을 지낸 권만영이고, 할아버지는 첫 찬성을 지낸 권만영이고, 아버지는 검교정승을 지낸 권만영입니다. 특히 그의 증조부모에게는 5남 4서가 모두 봉군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좌정승 한종유의 딸이었으니 친정 외가가 당대의 명문인 셈이죠. 그의 처가 역시 첫째 아내와 둘째 아내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특히 둘째 아내는 신돈의 횡포에 맞서 그를 탄핵한 이존오의 딸입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그가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자랑과 자질을 제공하여 그가 정치인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의 체제 유지를 위해 노력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도 태조와 태종이 그의 학문적 식견과 외교적 역량을 인정하고 그를 초빙함으로써 그는 다시 신흥조선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왕 11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문교 진흥에 기여하였습니다. 1375년에는 박상충,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친일외교를 주장하며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것을 반대하여 친원파인 이인임 등 보수세력의 공격을 받아 유배될 뻔하였으나 그가 아직 젊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권근은 이색과 마찬가지로 온건개혁의 입장을 취하였고, 1389년에는 이색적인 뜻에 따라 문하평리 윤승순의 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감독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급진세력을 억제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자 이색과 함께 반대했습니다.

이때 그는 이림(창왕의 외할아버지)의 일파에 몰려 극형을 받았으나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여 이색 일파처럼 청주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받아 익주에 머물면서 그를 유배지까지 찾아온 수많은 유생들을 위해 『입학도설』을 저술하였습니다.

조선왕조 개창 후 이듬해 이성계는 비개국 세력 회유책의 일환으로 하륜, 권근, 이첨, 조영 등에게 등용을 권했고, 권근도 이때 조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개국 세력에 합류했습니다.(조용히 합류한다.) 권근이 합류하게 된 데는 이성계가 그의 아버지 권희와 고향 학우였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개국세력의 비개국세력에 대한 시기와 음습한 공격으로 견제를 받아 표문제가 부상한 태조 5년부터 정치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표문제의 당사자인 정도전은 자신을 입조시키라는 명의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요동공격 계획을 세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은 정도전의 눈치를 보기 위해 정도전을 목숨으로 보내는 문제를 유보하였는데, 하륜만이 그를 목숨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여 정도전의 원한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권근은 정문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직접 생명에 갈 것을 자청하여 하륜과 함께 생명에 사신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태조의 신임을 얻었지만 개국세력의 견제는 계속되었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이 제거된 후 권근은 좌명공신이 되어 태종을 보좌함으로써 고려의 체제 유지를 위한 비개국 세력으로서의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태종 3년 그의 아들을 태종의 딸과 혼인시킴으로써 태종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제학에까지 이르러 겸 대사성직을 맡아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이 있으며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사서오경구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학도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설서로 후대에 『천명도설』의 모델이 되었으며, 이 『천명도설』이 발단이 되어 퇴계와 고봉 간의 47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나라 학문 발달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인들이 편찬한 『양촌집』40권이 있는데 여기에는 고려인물록인 『동현사략』과 조선 최초의 통사류인 『동국사략』 등의 사서가 들어 있고, 그의 잡저·시·행장 등이 들어 있으며, 정도전의 『불씨잡변』, 『심기리편』, 『심천문답』 등에 그가 써준 서문과 주해가 들어 있습니다.

권근은 고려조와 조선조 2대에 걸쳐 성균관 겸 대사 성직을 맡아 인재 양성과 후학 양성에 힘써 조선조 초기에 부족한 인재를 충당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대학의 학문적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지경연사와 세자사 등을 지내면서 국왕과 세자의 왕재 교육에 힘써 조선조 초기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권근은 정도전과 함께 당대의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한 경세사상가이자 후대에 학문적 영향력을 크게 남긴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왕조를 섬겼다는 이유로 변절했다는 낙인이 찍혀 한국도 통계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학문적·경세사상적 영향을 고려하면 그의 사상은 당연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 정치 성향

권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색문인으로서 고려왕조의 수성을 위해 창왕을 폐지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이색적인 다른 문인인 하륜·이첨·이숭인 등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는 특히 이성계, 정도종, 조준 등이 계획한 사전 폐지, 즉 토지개혁에 대해 이색, 이림, 우현보, 변안렬 등과 함께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권문세족으로서 부유층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때 귀양살이를 하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고 다시 조선조에 입사하여 이방원이 집권하자 하륜, 이첩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왕조 수성의 기초를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태종 5년 관제개혁에서는 기존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 중심의 의정부 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를 채택하여 각 조가 담당한 사안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을 직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세종 19년 의정부서사제로 환원될 때까지 왕권이 강화되었고 건국 초기 혼란기와 왕자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육조직계제에 동의한 이들은 주로 이색 문인들인 하륜·권근·변계량 등입니다. 이처럼 권근은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여 조선왕조 수성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권근은 태종 원년 태종이 즉위하자 상소를 올려 조선조 개국에 반대하고 고려에 충절을 바친 정몽주·길재 등의 절개를 제창할 것을 건의하였고, 3년 11월 태종은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를 증직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을 신망하고 그들의 절 정신을 사로잡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들의 충의정신을 선양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수호와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조선왕조를 500년 이상 지속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근은 태조 5년부터 조선과 명 사이에 제기된 표제로 양국 간의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표전은 왕가의 서신인데 조선조 개국 초기에 명나라에 보낸 표전이 세 번이나 문제를 일으켜 양국간에 불화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첫째, 1396년 태조 5년 2월에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문패에 경박하고 희롱하는 모욕적인 문구가 들어 있다고 해서 이 문패를 만든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패를 세운 사람은 개국공신 정도전(직접 지은 것은 아니지만)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체면상 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태조 5년 3월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받아 국왕이 보낸 주청문이 무례한 점이 있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셋째는 태조 6년 12월 명나라의 자문을 받아 조선에서 보낸 계문에 명나라를 깔보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까지 명나라는 정도전을 미워하고 직접 와서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하린은 정도정이 목숨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과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권근은 자신도 표문문 작성에 관여하였으므로 자신이 명나라에 가서 변명할 것을 자청하였으나 태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다시 간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고 명나라에 가서 능숙한 문장과 외교술로 어려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명황제의 하사품까지 받고 돌아왔습니다.

한편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이태조의 호응을 얻어 병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정도전의 요동 정벌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가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생명에 대해 4대례를 올렸지만 고려 후기 왕실이나 유학자들과는 달리 그가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완전한 국가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태조 7년 5월에 명나라 황제가 죽고 조선에서도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살해되고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정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요동 정벌 계획도 좌절되었습니다. 이 표제문제의 해결에서도 정도전과 달리 왕조의 일시적 안정을 꾀하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권근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정도전이 주도한 사병혁파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완전히 사병혁파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권근은 왕자의 난을 통해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폐지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사병개혁파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나중에 세종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병 폐지로 이방원은 순조롭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고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사병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은 없어졌습니다.

이상과 같이 권근은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친 관제개혁과 외교적 현안 문제 해결을 통해 양조체제 유지와 정치적 안정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반응형

댓글